본문 바로가기

설교자 분석

심성수 목사의 설교 스타일 — 학술 언어와 목회 언어 사이, 복음을 '살아내게' 하는 문법

라이프처치(서울 종로구, 대한예수교장로회) 담임 심성수 목사는 마태복음 8장 나병 환자 치유 설교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위로를 얻고 돌아가는 적당한 무리를 모으는 곳이 아니라, 예수를 온전히 살아내는 분명한 제자가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무리로 들어와서 제자로 나가는 교회.” — 마태복음 8:1-4 설교

이 선언은 그가 어떤 본문을 들고 강단에 서든 반복해서 등장하는 몇 가지 장치와 함께 작동한다.

유진 피터슨 — 가장 자주 불러내는 증인

심성수 목사가 가장 자주 불러내는 이름은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다. 그를 “피터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며, 메시지 성경의 번역이나 그의 목회 저서를 사무엘하, 전도서, 요한복음, 마태복음 등 다양한 본문에서 직접 인용한다. 인용의 기능은 언제나 같다. 신학적 언어를 회중의 언어로 전환하거나, 본문 인물의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사무엘하 7장 다윗 언약 설교에서 그는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 앞에서 자리에 앉은 장면을 설명하며 피터슨을 꺼낸다. “다윗은 앉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다윗이 행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행동이다. 행동하지 않기로 한 행동. 골리앗을 죽인 것보다, 법계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일보다 더 중요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인용 직후 회중에게 던진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뭔가 자꾸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분들.”

사무엘하 12장 나단과 다윗 설교에서는 나단의 비유가 다윗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피터슨의 통찰로 풀어낸다. “나단의 설교를 한 마디 한 마디 들을수록 다윗은 점점 더 종교적이 되어 간다. 동정심과 분노는 우리가 끝도 없이 즐길 수 있는데, 그 감정을 즐기는 동안 자기 자신이 그 사람임을 모르는 것이다.” 요한복음 1:14 성탄주일 설교에서는 ’거하심’이라는 단어를 해설하며 피터슨을 인용한다. “피터슨 목사님은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방문 정도가 아니라 이사해서 여기서 살았다는 거예요. 천막을 치고 눌러앉았다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5장 1-3절 설교에서는 메시지 성경의 번역을 직접 소개한다. “피터슨 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전도서 4:7-12 송년주일 설교에서도 메시지 성경의 번역이 본문 이해의 전환점이 된다. “피터슨 목사님은 이렇게 풀었어요. 나는 허물을 향해 가는 한줄기 연기를 봤다. 밤 늦도록 지독하게 일만 하는 외톨이다. 더 많이 가지려 사로잡혀 있을 뿐 결코 이렇게 묻지 않는다. 왜 나는 즐기지도 못한 채 이렇게 열심히 일만 하는 걸까?”

피터슨 인용 뒤에는 언제나 회중을 향한 목회 질문이 뒤따른다. 학문적 텍스처는 회중의 현실을 진단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헬라어 원어 — 한 단어가 본문을 여는 순간

원어 해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학적 정밀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의 뜻이 본문 전체의 긴장을 열어 주는 순간에만 짧게 등장한다.

골로새서 3장 설교에서는 ’감추어졌다’는 단어를 설명하며 헬라어를 꺼낸다. “원어를 찾아보니까 영어로 오토매틱(automatic)이라는 헬라어 원어가 있더라고요. 자동적으로 내가 씨를 심어 놓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어져 있다. 심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지.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 마태복음 5:4-6 설교에서는 ’애통’의 헬라어가 갖는 무게를 설명한다.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에요.” 누가복음 1:1-4 부활주일 설교에서는 누가복음 자체의 언어적 특성을 짚는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굉장히 수준 높고 정교한 고급 헬라어로 쓰여져 있어요. 의학적 관찰력을 가지고 꼼꼼하게 예수라는 인물을 관찰하고 살펴봐서 쓴 책입니다.”

마태복음 6:1-6 설교에서도 같은 방식이 쓰인다. ὑποκριτής(위선자)가 “무대에서 연극하는 배우”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라는 점을 설명하며, 외식이 곧 내면의 진실을 지우는 연기임을 논증한다. 원어는 긴 어학 강의가 되지 않는다. 한 단어의 뜻이 확정되면 즉시 본문의 신학적 긴장으로, 다시 회중의 삶으로 내려간다.

정체성 — 설교가 반복해서 돌아오는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책의 종류와 상관없이 심성수 목사 설교의 반복 귀결점이다.

마태복음 4:1-11 광야의 시험 설교에서 마귀의 유혹은 정체성 공격으로 읽힌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시작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도 거부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에스라 1장 설교에서는 70년 포로 생활이 만들어 낸 정체성 위기를 직접 명명한다. “정체성도 약해지고 그냥 포로의 삶이 일상이 되는 거예요. 이게 나의, 우리의 현실인 거예요.” 수요예배 고린도후서 10:4-5 설교에서는 가스라이팅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 언어가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분명한 정체성이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 패턴은 마태복음 5:13-16 설교의 한 문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정식화된다. “예수님은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너희는 소금이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정체성에서 삶이 나옵니다.” 삶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존재를 먼저 확인하는 것, 이것이 심성수 목사 설교가 매번 돌아오는 방향이다.

‘살아내다’ — 복음의 착지점

심성수 목사의 설교에서 가장 자주 돌아오는 동사는 “살아내다”이다. 복음은 예배당 안의 감동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감동이 일상의 구체적인 자리에 내려앉아야 한다는 것이 이 설교들이 반복하는 주장이다.

에스라 1장 설교의 결론부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찬양을 부르다가 은혜가 있었어요. 말씀을 듣다가 감동이 있었습니까? 오늘 그걸 가지고 우리가 살아내는 거예요.” 사무엘하 7장 다윗 언약 설교에서는 이 개념이 “평범함으로의 부르심”으로 표현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 일상을 기다리고 그냥 살아내는 게 더 어려운 겁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다 지금 이루어지지 않아도 아직 하나님을 기다리는 거예요.”

사도행전 16장 설교에서는 바울이 사역 계획이 모두 막힌 뒤 밥을 먹고 일어나는 장면이 이 언어로 해석된다. “하나님 떠나지도 않았어요. 눈물을 닫고 몸을 씻고 경배하고 밥을 먹으면서 그가 다시 살아내야 할 왕의 자리, 삶의 자리로 돌아왔어요.” 마태복음 8:1-4 나병 환자 치유 설교에서 이 표현은 가장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진짜 복음의 능력은 예배당 안에서 눈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너졌던 우리의 일상을 다시 살아내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현대 언어의 접목 — 가스라이팅, 도파민, 비교

심성수 목사는 현대 심리학과 대중문화의 언어를 성경 본문과 연결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수요예배 고린도후서 10:4-5 설교의 제목은 “너 지금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어”다. 영적 싸움이 어떻게 우리의 자기인식을 무너뜨리는지를 가스라이팅 개념으로 진단한 뒤, “우리 크리스천은 육신의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바울의 주장으로 연결한다. 수요예배 히브리서 11:24-26 설교는 “도파민 중독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모세가 왕궁의 즐거움 대신 고난을 선택한 이유를 현대 언어로 풀어낸다. 수요예배 히브리서 12:1-2 설교는 “비교라는 이름의 독화살”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심리가 신앙의 경주를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다룬다.

이 언어들은 단순히 제목의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각 설교 본론에서 그 현대 개념이 해당 본문의 신학적 내용과 촘촘하게 연결된다. 가스라이팅은 마귀의 정체성 공격으로, 도파민은 일시적 즐거움과 장기적 부르심의 갈림길로, 비교는 목표를 잃게 하는 장애물로 각각 성경적 논증과 이어진다.

개인 이야기의 삽입 — 설교자의 가정과 목회 경험

심성수 목사는 설교 중간에 자신의 가정 이야기나 목회 경험을 자주 꺼낸다. 이것은 청중의 주의를 끌기 위한 일화가 아니라, 본문의 논점을 삶의 차원에서 검증하는 기능을 한다.

사무엘하 7장 설교에서는 딸 로아가 외식비를 줄이려 한다고 말하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 한다는 본문의 핵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무엘하 12장 설교에서는 어머니에게 집안의 재정 결정을 원망했던 기억을 꺼내다가, 나단이 다윗에게 거울을 보여 주는 방식의 비유로 넘어간다. 마태복음 4장 광야 시험 설교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던 날과 어머니의 목회 이야기를 잠깐 꺼내며, 예수님의 세례 직후 광야로 이끌리신 맥락과 연결한다. 사도행전 16장 설교에서는 어느 날 교회에서 청년을 보고 강단 뒤에 숨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막으실 때 더 큰 뜻이 있다는 논점의 감정적 진실성을 확보한다.

이 개인 이야기들은 대체로 짧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에 등장했다가 다시 본문으로 귀환한다.

‘무리가 아닌 제자’ — 결론이 가리키는 방향

설교의 결론이 가리키는 방향은 매번 동일하다. 청중을 ’위로를 얻고 돌아가는 무리’가 아닌 ’예수를 온전히 살아내는 제자’로 초대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설교에서 이 교회론적 선언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온다. “위로를 얻고 돌아가는 적당한 무리를 모으는 곳이 아니라, 예수를 온전히 살아내는 분명한 제자가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무리로 들어와서 제자로 나가는 교회.”

같은 선언이 마태복음 5:1-3 설교에서도 명시적으로 반복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어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무리로 모아. 이렇게 안 하셨어요. 제자로 삼아라. 그리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그리고 회중에게 바로 묻는다. “혹시 무리가 아니세요?”

마태복음에서 나오든, 사무엘하에서 나오든, 에스라에서 나오든, 방향은 같다. 설교는 언제나 회중을 더 구체적인 제자도 안으로 초대하며 끝난다.


디디모랩 자료집도 바로 이 방식으로 섞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유진 피터슨 인용이 본문 이해의 전환점이 되듯이, 자료집의 학술 정보는 “오늘 여러분에게 던질 질문”을 더 정밀하게 만드는 배경 자료로 기능한다. 헬라어 원어 해설이 한 단어에서 본문 전체를 여는 것처럼, 원어 분석은 짧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꺼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결론 방향은 언제나 ’살아내는 삶’으로 내려와야 한다 — 심성수 목사 설교가 매번 그렇게 하듯이.

마태복음 9장 샘플 자료집의 본문 개관과 섹션 구조 예시


숨은 고수를 찾습니다. 연구 자료나 언론 보도는 없지만 탁월한 설교자를 알고 계신다면, didymus@didymuslab.com으로 제보해 주세요.

카카오

댓글

댓글을 불러오는 중...

댓글 남기기

작성한 댓글은 검토 후 공개됩니다. 이름과 댓글 내용만 저장되며 개인정보는 수집하지 않습니다.

이런 글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