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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알고 보니

바울 시대 유대교는 율법으로 구원받으려는 공로 종교가 아니었다

바울 서신을 다루는 설교 중 상당수는 이런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바울 당시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공로주의 종교였다. 바울은 그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 구도는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과도, 대부분의 개혁주의 설교 전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문제는 이 구도가 실제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이 보여주는 모습과 어긋난다는 데 있다. 1977년 미국 신약학자 E.P. 샌더스(E.P. Sanders)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후, 신약학계는 거의 반세기째 이 질문을 두고 논쟁하고 있다. 논쟁의 이름이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다.

옛 그림: 루터가 읽은 유대교

전통적인 그림의 뿌리는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씨름했던 중세 가톨릭의 공로 신학 — 선행을 쌓아 은혜를 얻으려는 구조 — 을 갈라디아서의 “율법의 행위”에 투사해 읽었다. 이 독법이 이후 개신교 주석 전통에 깊이 자리 잡았다. 20세기 초 독일 신약학자 페르디난트 베버(Ferdinand Weber)의 랍비 문헌 연구는 이 그림에 학문적 외피를 입혔고,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같은 20세기 중반 신약학의 거장들도 이 틀 안에서 바울을 읽었다. 결과는 이런 도식이다. 유대교=율법 준수로 의를 쌓는 공로 종교, 기독교=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은혜의 종교.

문제는 베버가 근거로 삼은 랍비 문헌 인용이 상당수 문맥에서 벗어나 있었고, 후대(3-5세기) 자료를 1세기 상황에 소급 적용한 경우가 많았다는 데 있다. 샌더스는 이 지점을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샌더스의 작업: 자료로 돌아가기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 Fortress Press, 1977)에서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 사이의 유대교 문헌 — 미쉬나·토세프타 같은 탄나임 문헌, 사해문서, 위경 — 을 원문 그대로 다시 읽었다. 결론은 기존 그림을 뒤집었다. 그가 검토한 문헌 어디에서도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구조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반복되는 패턴은 이랬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먼저 세우신 언약으로 이미 그분의 백성이다(선택·출애굽·시내산 언약). 율법 준수는 그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의 관계 “안에 머물기 위한” 응답이다.

샌더스는 이 패턴에 이름을 붙였다.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 핵심 명제는 이렇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2. 율법은 그 선택에 대한 순종의 응답이며, 동시에 언약 안에 머무는 수단이다.
  3. 하나님은 순종에 보상을, 불순종에 징계를 정하셨다.
  4. 율법은 속죄의 수단(회개·희생제사)도 제공한다.
  5. 이 전체 틀에 머무는 자는 구원받은 자로 간주된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언약 관계) 안에 머물기 위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이 구조가 개신교의 은혜 신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 오히려 신약학자들이 유대교를 이해할 때 자신들의 종교개혁적 렌즈를 투사해 왜곡했다는 것이다.

새관점: 제임스 던과 “율법의 행위”

샌더스의 작업 자체는 갈라디아서·로마서의 바울 논증을 새로 읽는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 작업을 이어받은 사람이 영국 신약학자 제임스 던(James D.G. Dunn)이다. 던은 1982년 맨체스터에서 행한 맨슨 기념 강연에서 “바울에 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이듬해 이를 논문으로 출판했다(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65, 1983).

던의 핵심 논증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반복해서 비판하는 표현 “율법의 행위”(ἔργα νόμου, erga nomou)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 전통적 독법은 이 표현을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선행 일반”으로 읽고, 바울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 자체”를 비판했다고 본다. 던은 이 표현이 실제로는 할례, 정결법, 안식일 준수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민족적 경계표지(boundary markers)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갈라디아 교회의 실제 논쟁 상황 — 이방인 신자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 을 보면, 바울의 비판 대상은 “선행으로 구원받으려는 개인주의적 공로주의”가 아니라 “이 경계표지들을 요구해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에서 배제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 재해석이 맞다면, 바울과 유대교 반대자들의 논쟁 지점 자체가 달라진다. 전통적 독법: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유대인 vs. 은혜로 구원받는 바울.” 새관점: “할례를 요구해 언약 공동체를 유대 민족으로 좁히려는 유대인 vs. 이방인도 믿음으로 온전한 언약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는 바울.”

N.T. 라이트: “하나님의 의”와 언약

새관점을 대중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가장 널리 확산시킨 이는 영국 신약학자·성공회 주교 N.T. 라이트(N.T. Wright)다. 라이트는 『성 바울을 다시 생각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1997)와 방대한 학술서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2013)에서 로마서의 핵심 개념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를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재정의했다. 이 독법에서 “칭의”(justification)는 개인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전환되는 심리적·법정적 사건”이라기보다 “누가 이미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해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에 가까워진다. 칭의의 무게중심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서 “누가 언약 공동체에 속하는가”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렘브란트,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1627) 렘브란트,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1627),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소장 · Public Domain.

반론: 유대교는 그렇게 균질하지 않았다

새관점이 학계 주류의 지지를 받은 적은 없다. 특히 개혁주의·복음주의 진영에서 조직적인 반론이 이어졌다. 가장 무게 있는 반박은 D.A. 카슨(D.A. Carson), 피터 오브라이언(Peter T. O’Brien), 마크 세이프리드(Mark A. Seifrid)가 편집한 2권짜리 논문집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Baker Academic / Mohr Siebeck, 2001-2004)이다. 제목의 “variegated”(다채로운, 얼룩덜룩한)라는 단어 자체가 논증의 핵심이다. 편집자들은 샌더스가 제2성전기 유대교를 지나치게 단일한 패턴(“언약적 신율주의”) 하나로 뭉뚱그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는 문헌마다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에스라4서(4 Ezra) 같은 묵시문학에는 최후 심판에서 개인의 공로가 훨씬 강하게 부각되는 대목들이 있고, 사해문서 공동체규율서도 문헌에 따라 은혜와 공로의 강조점이 다르다.

스티븐 웨스터홀름(Stephen Westerholm)은 『Perspectives Old and New on Paul』(Eerdmans, 2004)에서 옛 관점의 정당한 통찰을 옹호했다.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며 다루는 문제는 여전히 개인의 죄책과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 무능력이라는 것이다. 사이먼 개더콜(Simon Gathercole)의 『Where Is Boasting?』(Eerdmans, 2002)도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다루는 “자랑”이 단지 민족적 특권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최후 심판에서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내세우는 자랑이라고 논증하며 새관점의 핵심 축을 겨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간 흐름도 있다. 스웨덴 신학자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이 1963년 발표한 유명한 논문 “서구의 자기 성찰적 양심과 사도 바울”(Harvard Theological Review 56)을 원류로 삼는 “유대교 안의 바울”(Paul within Judaism) 학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이 자신을 유대교를 떠난 개종자로 여긴 적이 없으며 이방인만을 향한 사명을 받은 유대인 예언자로 스스로를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폴라 프레드릭슨(Paula Fredriksen)의 『Paul: The Pagan’s Apostle』(Yale University Press, 2017), 마크 나노스(Mark Nanos)의 여러 연구가 이 노선에 속한다.

설교자에게 남는 것

이 논쟁을 다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새관점 내부에도 던과 라이트의 입장 차가 있고, 반론 진영 안에도 결이 다른 논증들이 있다. 지금도 국제 신약학회(SNTS)와 복음주의신학회(ETS)에서 이 주제로 논문이 계속 발표된다. 다만 강단에 서는 목회자가 이 논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 “1세기 유대교=율법으로 구원받으려는 공로 종교”라는 도식을 설교에서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일은 이제 학문적으로 근거가 취약하다. 이 캐리커처는 실제로 랍비 유대교와 현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오해와 반유대주의적 편견을 강화해 온 역사가 있다는 점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둘째,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설교할 때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 일반적 선행인지, 할례·정결법 같은 경계표지인지, 혹은 둘 다인지 — 본문의 논쟁 맥락(갈라디아 교회의 할례 논쟁, 로마 교회의 유대인·이방인 신자 관계)을 살펴 판단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셋째, 이 논쟁 전체가 보여주는 더 큰 교훈이 있다. 바울 신학은 진공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실제 1세기 유대교라는 구체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맥락을 정확히 알수록, 바울이 실제로 씨름했던 질문과 오늘 우리가 그 본문에서 던지는 질문 사이의 거리를 더 정직하게 가늠할 수 있다.

참고 자료

  • E.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 James D.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65 (1983): 95-122.
  • N.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3).
  • D.A. Carson, Peter T. O’Brien, Mark A. Seifrid, eds.,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2 vol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 Tübingen: Mohr Siebeck, 2001-2004).
  • Stephen Westerholm, Perspectives Old and New on Paul: The “Lutheran” Paul and His Critics (Grand Rapids: Eerdmans, 2004).
  • Simon Gathercole, Where Is Boasting? Early Jewish Soteriology and Paul’s Response in Romans 1-5 (Grand Rapids: Eerdmans, 2002).
  • Krister Stendahl,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arvard Theological Review 56 (1963): 199-215.
  • Paula Fredriksen, Paul: The Pagan’s Apostl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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