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알고 보니
‘내 이웃은 누구인가’, 레위기와 선한 사마리아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성경의 익숙한 계명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과 함께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답으로 제시하신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이웃’은 누구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그 질문을 어떻게 이어받을까?
한 절을 넘어 같은 장 전체를 읽으면 중요한 사실이 보인다. 레위기 19장은 이스라엘 내부의 관계를 다루면서 체류자에 대한 사랑도 명시적으로 명한다. 이 장의 윤리를 공동체 안의 사람만 돌보라는 규칙으로 줄일 수는 없다.
가까운 문맥과 더 넓은 용례
레위기 19장 17~18절에는 형제, 동포, ‘네 백성의 자손’이라는 표현에 이어 ‘네 이웃’, 곧 레아(רֵעַ)가 나온다. 많은 학자는 이 연결을 근거로 이웃을 일차적으로 동족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읽는다. 존 J. 콜린스는 이런 문맥적 해석을 지지하며, 제이콥 밀그롬의 주석은 이 장을 더 자세히 살필 자료다.
다만 레아라는 단어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을 뜻하지는 않는다. 출애굽기 11장 2절에서는 이집트 이웃들에게도 사용된다.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은 넓은 용례와 레위기 19장의 체류자 규정을 강조하며 사랑의 계명을 동족에게만 한정하는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견의 핵심은 어떤 문맥에 무게를 두느냐이지, 단어 하나가 언제나 민족적 경계를 표시하느냐가 아니다.
레위기 19장 자체가 시작한 확장
흥미로운 것은 이 범위 확장이 신약을 기다릴 필요 없이 레위기 19장 안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이다. 같은 장 34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이스라엘 안에 거주하는 이방 체류자, 곧 게르(גֵּר)에게 18절과 거의 동일한 사랑의 계명(“자기같이 사랑하라”)이 확장 적용된다.
이 확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흥미롭다.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역사적 경험 —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다” — 이다. 18절의 이웃을 어느 범위로 읽든, 34절이 체류자 사랑을 명시적으로 요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취약했던 처지가 그 의무의 구체적인 근거가 된다.
질문의 틀을 바꾸신 예수님
누가복음 10:25-37에서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웃 사랑의 의무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묻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범위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답하지 않으신다. 대신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해 지나가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경멸받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돌보는 비유를 들려주신다.
비유의 결말이 결정적이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자가 누구냐”고 되물으신다. 조엘 그린(Joel B. Green)은 『누가복음』 주석(The Gospel of Luke, NICNT, Eerdmans, 1997)에서 이 반문이 단순히 이웃의 대상 범위를 넓힌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의 구조를 뒤집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누가 이웃으로 행동했는가”로 질문을 재구성하신다. 클라인 스노드그래스(Klyne Snodgrass)도 그의 비유 연구서 『의도를 가진 이야기들』(Stories with Intent, Eerdmans, 2008)에서, 이 비유가 이웃을 특정 범주의 사람으로 규정하는 시도 자체를 무력화하며 사랑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의 문제로 전환시킨다고 분석한다.
이것은 사랑 없는 유대교와 자비로운 기독교를 대립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교 성경 해석 안에서 일어나는 질문이다. 레위기 자체가 체류자 사랑을 명한다. 사마리아인도 이스라엘의 조상 전승과 토라를 공유했으므로 단순한 이교도 이방인으로 부르면 비유의 경계를 흐리게 된다. 비유는 성경 전승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적대하던 공동체 사이의 장벽을 건드린다.
이웃을 찾는 질문에서 이웃이 되는 실천으로
레위기는 이웃 사랑과 체류자 사랑을 함께 명한다. 누가복음의 비유는 사마리아인의 자비로운 행동을 결정적인 모범으로 제시한다. 두 본문을 함께 읽기 위해 인색했던 종교가 관대한 후계 종교로 바뀌었다는 단순한 역사를 만들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의 성경에 이미 있는 계명이 독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경계에 어떻게 도전하는지 살필 수 있다.
율법교사가 누가 이웃에 해당하는지 묻는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질문을 듣는 사람에게 돌려준다. 지금 내가 누구의 필요에 응답할 것인가?
렘브란트,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 1630년경 · 월리스 컬렉션(런던)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친 자리에, 경멸받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옮기는 장면을 그렸다. 비유 속 자비의 행동을 눈앞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미지 정보.
디디모랩은 원어와 역사적 맥락을 함께 살피는 설교 준비 자료집을 제공한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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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Milgrom, Leviticus 17-22: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nchor Bible 3A; Doubleda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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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l B. Green, The Gospel of Luke (NICNT; Eerdmans,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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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yne Snodgrass, Stories with Intent: A Comprehensive Guide to the Parables of Jesus (Eerdman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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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J. Collins, “Love Your Neighbor: How It Became the Golden Rul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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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Elliott Friedman, “The Exodus, the Alien, and the Neighbo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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