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분석

장재령 목사의 설교 스타일 — 교회력의 시간 속에서 주변부를 읽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이하 숲교회) 담임 장재령 목사의 설교는 스스로 ‘익명의 다수’에게 공개되기를 거부한다. 2025년 새해 첫 설교에서 그는 직접 말했다. “숲교회의 설교가 주일 예배라는 시공간과 숲 사람들이라는 관계성 안에서 흘러가는 소리가 되도록, 앞으로 설교를 유튜브에서 익명의 다수에게 공개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와 관계 속에 울려야 한다는 원칙이 그의 설교 신학의 출발점이다. 이 글은 장재령 목사의 설교 스타일을 교회력·본문 읽기·문학적 해석·목회적 취약성의 네 축으로 살펴본다.

교회력을 따르는 순차 강해

장재령 목사의 설교 구조를 가장 먼저 형성하는 것은 교회력(liturgical calendar)이다. 숲교회의 주일 설교 시리즈 “[숲에주신말씀]“은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그 절기에 배정된 본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룻기는 대림절 직전에 배치되고, 사무엘하의 다윗 이야기는 성령강림절 후 반기에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설교 본문 선택의 편의가 아니다.

장재령 목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바람과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담은 성전을 무너뜨리는 방식”(누가복음21:25-36 설교)을 설명하면서, 종말의 시간을 현재 위에 포개는 행위가 기도와 설교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교회력은 바로 그 포개기의 구조다. 회중은 대림절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부활절마다 ‘빈 무덤 앞에 선 사람들’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초대받는다. 설교자가 교회력을 따른다는 것은, 회중이 자신의 지금 이 시간을 우주적 구원의 리듬 안에서 읽도록 돕겠다는 신학적 결단이다.

사무엘상하를 여러 주에 걸쳐 연속 강해하는 방식도 같은 논리 위에 있다. 다윗이 들판의 소년으로 시작하여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사무엘하 6장), 권력의 정점에서 밧세바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며(사무엘하 11장), 나단 선지자의 비유 앞에서 무너지기까지(사무엘하 12장)의 흐름은 단편적인 교훈으로 재단되지 않고, 한 인간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변질되는지를 회중이 함께 추적하는 과정이 된다. 강해는 어떤 주제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회중이 성경 안을 걸어 다니는 시간이다.

‘그 사람이 되어’ 읽기 — 문학적 성경 해석

장재령 목사의 설교에서 시와 소설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핵심 도구다.

룻기 설교에서 그는 소설가 김영아의 말을 인용한다. “소설 읽기는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는 이 원리를 성경 읽기에 그대로 적용한다. “성경 읽기 또한 성경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마주하고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룻이라는 이방 여성의 삶을 해설하면서 그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이 여성에게 생존과 다르지 않았다는 현실, 모압 여성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혀의 즐거움,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을 구체적으로 그린다. 이 ‘그 사람 되기’는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회중이 성경 안의 인물에게 공감 능력을 훈련하는 방법론이다.

법궤 설교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가 내게로 왔다」가 핵심 해석 틀로 등장한다. 네루다가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내게 오는 것이라고 말하듯, 하나님의 말씀 역시 인간이 통제하고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법궤처럼 ‘내게로 오는’ 것이라고 설교는 말한다. 웃사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러운 본문이, 설교자가 억지로 풀어내는 도덕 교훈이 되는 대신 ‘이야기의 주도권이 인간에서 하나님에게로 넘어가는 순간’으로 읽힌다.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시는 사무엘하 12장 설교에서 등장한다. 클라리언 강가에서 강과 바위와 이끼가 “나도 신성함의 일부다”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올리버가 듣는 장면을, 장재령 목사는 나단의 비유 속 암양 새끼 한 마리에서 하나님을 보는 다윗의 회심과 연결한다. 시는 여기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예증하는 예화가 아니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다른 언어적 형태다.

비상계엄과 광야 — 사회적 현실과 본문의 만남

장재령 목사의 설교는 정치·사회적 현실 앞에서 우회하지 않는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 직후의 주일, 그는 누가복음 3장 1-6절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 주 화요일 밤 계엄 선포를 경험한 이야기를 직접 꺼낸다. “대통령은 자기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 규정하고 군인들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을 내림으로써 이 나라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는 이 현실에서 본문의 장면으로 이동한다. 로마 황제 디베료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그 역사적 정치 환경이, 지금 한국의 상황과 겹쳐 읽힌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 있는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들려오지 않고, 오히려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합니다.” 계엄이라는 극단적 국가폭력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오는 장소는 광야이고, 권좌가 아니다. 설교는 이 구조를 오늘의 회중에게 적용한다. 삶이 갑자기 멈추는 광야 같은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터전이 된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한강의 노벨상 수상 언급에도 나타난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설교에서 장재령 목사는 한강 소설에 대한 스톡홀름 선언(“성취나 속죄의 여지가 없다”)을 인용하며, 문학이 인간의 외적 성취가 아니라 삶의 취약성을 마주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로 돌아보는 일’의 신학적 근거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정치적 사건도 문학 수상도, 그의 설교 안에서는 본문의 의미를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

주변부를 향한 시선

장재령 목사의 설교에는 일관된 윤리적 축이 있다. 그것은 주변부와 약자를 향한 시선이다.

룻기 설교에서 그는 서울이 포브스 선정 세계 10대 도시임을 언급한 뒤 이렇게 말한다. “이 서울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룻과 같은 여성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아파트와 같은 비좁은 울타리에서 비슷한 삶의 구조와 수준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사실 이런 여성을 만날 일이 전무합니다.” 이것은 고발이라기보다 자기 인식이다. 그는 회중과 자신을 동일한 자리에 놓고,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키는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무엘하 11-12장 설교에서 이 시선은 더 선명하다. “강자들의 역사와 약자들의 눈물은 그저 성경책 사무엘하 11장에 있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노동자의 죽음, 무고한 젊은이들의 희생,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그는 본문의 다윗과 우리아의 이야기와 같은 층위에서 읽는다. 여기서 설교는 도덕 강화가 아니라 현실 진단이 된다.

목회적 취약성과 토요일 밤의 기도

장재령 목사의 설교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요소는 설교자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신년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설교 준비가 매우 힘듭니다. 토요일과 주일에는 평소 잘 가지 않던 화장실을 수도 없이 드나들며 동동거리면서 지냅니다. 저는 토요일 밤마다 하나님께 제발 살려 달라는 기도를 많이 드려왔습니다.” 또한 그는 설교자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 다른 설교자에게 주일 강단을 부탁했던 것이 사실 ‘요나의 심정’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다.

이 자기 고백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말씀의 능력이 설교자의 유창함에 있지 않다는 신학적 확신의 다른 표현이다. “설교는 말의 유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잊지 않고, 그 능력이 머물고 담길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려고 합니다.” 설교자가 그릇이 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사무엘상 8장 설교에서 늙은 사무엘이 마음이 복잡할 때 기도로 나아가는 장면을 다루면서, 그는 “눈을 감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자기 소견, 눈을 감고 나의 말을 그치는 것이 그의 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침묵의 영성은 설교 준비 방식과 연결된다. 토요일을 종일 골방에서 보내는 것은 규율이 아니라, 말씀이 ‘내게로 오도록’ 자신을 비우는 훈련이다.

장재령 설교 스타일이 남기는 것

장재령 목사의 설교는 몇 가지 일관된 특징으로 요약된다.

구조 면에서 그는 교회력을 따르는 순차 강해를 선택한다. 이는 회중이 특정 시간·장소·관계 안에서 말씀을 듣는다는 설교 신학과 직결된다. 해석 면에서는 시와 소설을 핵심 주석 도구로 삼으며, ‘그 사람이 되어 읽기’라는 문학적 방법론을 회중에게 훈련시킨다. 내용 면에서는 주변부와 약자를 향한 일관된 시선이, 사회적 현실을 본문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설교자 자신의 취약성과 기도의 고투를 숨기지 않는 목회적 투명성도 특징이다.

숲교회 설교가 이름처럼 익명의 다수에게가 아니라 특정 공동체를 향해 선포된다는 원칙은, 이 모든 요소의 기반이다. 설교는 울리고 사라지는 소리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강단이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를 결정한다.


참고 영상

아래는 이 글의 분석에 사용한 실제 자막 기반 영상입니다.

  1. 육신이 말씀이 되어 | 요한복음1:1-18
  2. 빈들을 가진 사람들 | 누가복음3:1-6
  3. 시간을 포개는 사람들 | 누가복음21:25-36
  4. 서로 돌아보아 | 히브리서10:24
  5. 빛이 새어나오는 곳 | 룻기1-4장
  6. 암양 새끼 한마리 안에 하나님 | 사무엘하11:26-12:13
  7. 예수라는 경이 | 사무엘하11:1-15
  8. 이 초라한 오두막은 하늘보다 크고 넓어라 | 삼하7:1-16
  9. 법궤가 내게로 왔다 | 사무엘하6:1-19
  10. 늙은 사무엘 곁에서 | 사무엘상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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