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준비
성화(聖畵), 설교자가 읽어야 할 두 번째 언어
예배당에 걸린 그림 앞에서 우리는 몇 초나 머무를까. 미술관 관람객이 한 작품 앞에 평균 17초 머문다는 연구가 있다. 설교자라고 다를까.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는 바로 그 17초를 문제 삼는다. 최근 출간된 그의 책 《최주훈의 명화 이야기 — 보는 것에서 읽어 내는 것으로》(비아토르)는 제목 자체가 하나의 명제다. 성화 감상은 ‘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에 가깝다는 것.
최 목사는 월간지 「복음과상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양 미술은 교회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만큼, 신학자나 목사들이 다른 관점에서 더 풍성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화에 새겨진 신학적 문법을 이미 품고 있는 설교자야말로 그림을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출처: 여운송, 「그림 앞에서 루터신학이 묻는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복음과상황』 414호, 2025년 5월)
루터가 판화를 택한 이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판화·음악 등 당대의 모든 매체를 복음 전파에 적극 활용했다. 최 목사는 이 점에 대해 “목표가 분명했기에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고 평가한다. 루터에게 성화는 예배의 장식품이 아니라 복음을 전달하는 교육적 도구였다.
루터는 1522년, 비텐베르크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자 연속 8회의 설교를 통해 이를 막았다. 그는 가톨릭의 성상 숭배도, 츠빙글리·칼뱅의 극단적 우상 척결도 아닌 중간 길(via media)을 제시했다. 이미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에 부여되는 성물적(聖物的) 권위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루터파 교회가 오늘날까지 십자가상·성화를 예배 공간에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뱅의 반대,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유산
반면 칼뱅은 단호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라는 그의 경고는 시각 예술 전반에 대한 엄격한 절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칼뱅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 개신교는 **‘듣는 종교’**로 자리잡았다. 말씀 선포가 중심에 서고, 이미지는 주변으로 밀렸다.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물음은 남는다. 오직 언어로만 선포되는 복음은 얼마나 많은 회중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닿고 있을까.
현대 신학의 재발견 — 이미지는 언어보다 보편적이다
독일 선교신학자 테오 준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예술을 통한 현존의 조명이 말씀을 통한 현존의 조명을 능가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예술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지는 번역이 필요 없는 언어다. 신학적 개념이 언어의 장벽에 막힐 때, 그림은 그 경계를 가뿐히 넘는다.
(준더마이어 인용은 채수일, 「그리스도교적 이미지와 새로운 신학적 이해」, 에큐메니안, 2023.01.17에서 재인용)
Duke Divinity School의 신학자 제레미 베기(Jeremy Begbie)는 예배에서 시각 요소가 갖는 수신(受信)의 힘을 강조한다. 설교자가 진리를 선포했더라도, 말씀과 함께 작동하는 공간·이미지·분위기 등의 비언어적 요소들이 회중의 수신 방식을 함께 결정한다는 것이다. 귀만이 아니라 눈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통로다.
에큐메니안에 실린 채수일 전 한신대 총장의 글은 이를 신학적으로 정리한다. “이미지와 예술은 단순한 설명이 아닌 독립적인 사유의 방식”이며, 예술은 “계시와 하나님의 자기-의사소통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설교자가 성화를 ‘읽는’ 다섯 가지 이유
1. 성화는 신학적 해석의 화석이다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소명〉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빛과 어둠의 대비, 손짓의 방향, 탁자 위의 동전 — 하나하나가 당대 신학의 언어다. 성화 한 장이 주석서 한 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2. 본문에 대한 상상력을 열어준다
성화 화가들은 종종 본문이 침묵하는 곳에서 질문을 던진다. “마리아의 표정은 어땠을까?” “제자들이 빈 무덤을 보았을 때의 몸의 자세는?” 그 질문이 설교자의 상상력을 깨운다.
3. 회중에게 다른 통로를 열어준다
개념과 명제로 닿지 않는 마음에 이미지가 닿을 때가 있다. 특히 장기 청취 피로를 느끼는 회중에게 시각적 매개는 새로운 수신 채널이 된다.
4. 루터의 전통이 이를 허용한다
한국 개신교의 다수 흐름이 칼뱅을 따르더라도, 성화를 교육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더 넓은 전통 안에 있다. 성화를 숭배하는 것과 성화를 읽는 것은 다르다.
5. ‘보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의 훈련
최 목사의 말처럼, 성화를 17초 보고 끝내지 않고 그 안의 상징과 서사를 읽어내는 것은 설교자 자신의 본문 읽기 훈련과 닮아 있다.
나가며
설교는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니다. 시각, 공간, 몸의 기억이 함께 복음을 받아들인다. 성화를 설교에 가져오는 것은 다른 종교의 관행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서양 기독교 역사 2천 년이 쌓아온 신학적 언어를 되찾는 것에 가깝다.
최주훈 목사가 말했듯, “신학자나 목사들이 다른 관점에서 더 풍성하게” 그림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 성화는 설교자에게 세 번째 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 여운송, 「그림 앞에서 루터신학이 묻는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복음과상황』 414호, 2025년 5월 — 원문 링크
- 채수일, 「그리스도교적 이미지와 새로운 신학적 이해」, 에큐메니안, 2023.01.17 — 원문 링크
- 최주훈, 《최주훈의 명화 이야기 — 보는 것에서 읽어 내는 것으로》, 비아토르,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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