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성서해석
화가들의 성서해석 ② 카라바조 — 「의심하는 도마」와 손끝의 신앙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기 옷을 걷어 옆구리를 드러낸다. 그 손이 도마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 쪽으로 이끈다. 도마의 검지 손톱 밑까지 살갗이 파고든 듯한 이 장면 앞에서, 보는 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1편에서 다룬 「성 마태오의 소명」이 부르심의 순간을 그렸다면, 이 그림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 중 하나가 끝내 의심했던 순간을, 카라바조 특유의 physical한 방식으로 그립니다.
본문 — 요한복음 20장 24~29절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전하자 도마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
여드레 뒤,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 도마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이 마지막 말씀 때문에 도마는 오랫동안 “믿음이 부족한 제자”의 대명사처럼 다뤄져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카라바조는 이 본문에서 그 훈계보다 훨씬 앞선 지점, 곧 도마의 손가락이 실제로 상처에 닿는 그 물리적 순간에 카메라를 고정합니다.
그림 분석 — 손끝이 하는 신학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c. 1601–1602년, 캔버스에 유채, 107×146cm — 상수시 회화관(포츠담, 독일). 퍼블릭 도메인(Wikimedia Commons, PD-Art / CC0).
네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스도, 도마,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서로 머리를 맞대다시피 밀착해 있고, 배경은 관례대로 거의 완전한 어둠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장면에서 세 가지 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 도마의 손목을 붙잡아 이끄는 그리스도의 손, 상처 쪽으로 뻗은 도마의 손, 그리고 도마 자신이 스스로 그 손을 다시 확인하려는 듯 응시하는 시선.
이 그림에서 가장 오래된 논쟁은 도마의 손가락이 실제로 상처 “안”에 들어가 있는가입니다. 화면만 보면 손가락 끝이 피부 표면에 닿아 있는 것도, 살짝 파고든 것도 같은 애매한 지점에 있습니다. 이 모호함이 우연이 아니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 카라바조는 본문이 실제로 확정하지 않는 것(도마가 정말 손가락을 “넣었는지” 여부는 본문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을 시각적으로도 확정하지 않은 채, 그 경계선 위에 시선을 붙잡아 둡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은 그리스도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가 수동적으로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도마의 손목을 붙잡아 직접 이끈다는 점입니다. 의심을 해소하는 주도권이 도마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면 이 장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신학적 해석 — 만져야 믿는 신앙의 정당화
이 그림이 하는 신학적 작업은 단순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 앞에서 흔히 도마는 열등한 신앙의 표본으로 소비되지만, 카라바조는 오히려 그 열등하다는 신앙 방식 — 감각으로 확인해야만 믿는 신앙 — 을 그림 전체의 물리적 무게로 정당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상화된 부활체가 아니라 여전히 만질 수 있고 상처가 남은 몸으로 그려집니다. 부활이 영적 사건일 뿐 아니라 물질적·신체적 사건이라는 것을, 손끝의 접촉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증언하는 셈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601-1602년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유물·성상·감각적 신앙 실천을 개신교의 형상 파괴(iconoclasm)에 맞서 적극 옹호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손으로 만져 확인하는 신앙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육신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신학적 주장과, 카라바조의 이 그림이 정확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편의 「성 마태오의 소명」이 부르심의 즉각성을 다뤘다면, 이 그림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신앙조차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감각적으로 확인받아야 하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다음 편 예고
카라바조 3편에서는 그의 후기·말년작인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다룹니다. 특히 다윗이 들고 있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가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승리의 도상이 아니라 참회의 자기 고발로 읽힙니다.
이 글이 기댄 문헌
국내
- 고종희,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 (한길사, 2023)
영미권
- Howard Hibbard, Caravaggio (Harper & Row, 1983)
- Catherine Puglisi, Caravaggio (Phaidon, 1998)
- John T. Spike, Caravaggio (Abbeville Press, 2001)
- Andrew Graham-Dixon, Caravaggio: A Life Sacred and Profane (Allen Lane, 2010)
독일어권
- Sybille Ebert-Schifferer, Caravaggio: Sehen – Staunen – Glauben (C.H. Beck, 2009; 영역 Caravaggio: The Artist and His Work, Getty Publications, 2012)
이탈리아어권
- Roberto Longhi, Caravaggio (Editori Riuniti, 1952)
그림 이미지는 Wikimedia Commons에 퍼블릭 도메인(PD-Art)으로 등재된 스캔의 축소본(1280px)을 사용했습니다. 위 문헌은 전부 실재하는 표준 연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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