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알고 보니
요한복음 21:15-17,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정말 다른 사랑인가
요한복음 21장 15-17절은 부활 이후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는 장면이다. 이 본문에 관한 설교 중 가장 많이 반복되는 주제가 하나 있다. 예수님은 처음 두 번은 ἀγαπᾷς(아가파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매번 φιλῶ(필로)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예수님은 “신적이고 완전한 사랑”으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인간적인 우정”으로만 답한다.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도 필레오로 내려오시면서 베드로를 만나주신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 해석은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데 코이네 헬라어 어휘의미론과 요한복음의 문체 패턴이라는 두 가지 근거가 이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James Tissot · Feed My Lambs(내 어린양을 먹이라), c. 1886–1894 · Brooklyn Museum · Public Domain. 요한복음 21:15-17 장면을 묘사한 화가의 상상화이며, 당시의 기록 사진이 아닙니다.
두 단어는 코이네 헬라어에서 얼마나 달랐는가
고전 아티카 헬라어에서 ἀγαπάω(아가파오)와 φιλέω(필레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의미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쓰인 1세기 코이네(κοινή) 헬라어에서는 두 단어의 의미 범위가 상당히 겹쳤다. 이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정리한 것이 D.A. 카슨의 『주석적 오류(Exegetical Fallacies)』(Baker Academic, 1996년 2판)이다. 카슨은 제1장 “단어 연구 오류”에서 이 본문을 “어휘 오류의 대표 사례”로 직접 지목하며, 두 단어가 이 맥락에서 신학적 위계를 나타낸다는 주장은 언어학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카슨이 제시하는 핵심 증거가 있다. 요한복음 3장 35절은 ἀγαπᾷ(아가파오)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고 쓰고, 요한복음 5장 20절은 φιλεῖ(필레오)로 같은 관계를 다시 표현한다. 동일한 저자가, 동일한 관계(아버지-아들의 사랑)를 두 장에 걸쳐 두 단어로 번갈아 썼다. 만약 두 단어가 의미론적으로 의도된 위계를 가졌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어떤 때는 더 높은 수준으로, 어떤 때는 더 낮은 수준으로 사랑한다는 결론이 되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주석가는 없다.
요한복음 저자의 동의어 교차 문체
요한복음 21장 15-17절 자체를 면밀히 읽으면 또 다른 패턴이 드러난다. 이 짧은 본문 안에서 동의어 쌍이 반복 교차한다.
- 먹이다: βόσκε(보스케, 먹이다) ↔ ποίμαινε(포이마이네, 치다·인도하다)
- 양: ἀρνία(아르니아, 어린양) ↔ πρόβατά(프로바타, 양)
- 사랑하다: ἀγαπᾷς(아가파스) ↔ φιλεῖς(필레이스)
세 쌍 모두 같은 짧은 본문 안에서 교차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의도된 신학적 위계를 만들기 위해 다른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관습으로 동의어를 번갈아 쓰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런 동의어 교차 패턴은 21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알다”를 뜻하는 οἶδα(오이다)와 γινώσκω(기노스코)도 같은 방식으로 교차 사용된다. 이것은 개별 단어의 뜻이 아니라 이 저자의 글쓰기 습관이다.
C.K. 배럿(C.K. Barrett)은 요한복음 주석(Westminster Press, 1978년 2판)에서 이 문체 현상을 지적하며 두 단어의 교차가 요한의 “문체적 변주”임을 지지한다.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도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주석(Doubleday, 1970)에서 비슷한 방향으로 이 본문을 다룬다. 스탠더드 헬라어 사전(BDAG)도 두 단어가 공유하는 넓은 의미 영역을 보여준다.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
아가파오-필레오 구분을 내려놓으면, 요한복음 21장의 이 장면이 실제로 말하는 것이 더 선명해진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요 18:17, 25, 27)과 정확히 대응된다. 질문이 세 번이라는 것, 그것이 이 본문의 핵심이다. 헬라어 단어 선택의 신학적 위계가 아니라, 세 번 부인한 그에게 세 번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행위가 이 장면을 만든다.
설교에서 아가파오-필레오 구분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단어 하나의 변화로 내면의 드라마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뒷받침하지 않는 신학적 주장은,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본문 위에 얹혀진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 회복 장면은 그런 조력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충분히 강렬하다.
참고 자료
- D.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2nd ed. (Baker Academic, 1996), 제1장 “단어 연구 오류”
- C.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2nd ed. (Westminster Press, 1978)
-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2 (Anchor Bible 29A; Doubleday, 1970)
- Walter Bauer et al.,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BDAG), 3rd e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s.v. ἀγαπάω and φιλέ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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