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알고 보니
"바늘귀 문"은 실재하지 않았다 — 마태복음 19:24의 과장법과 중세 난외주
많은 설교에서 마태복음 19장 24절을 이렇게 소개한다. “예루살렘 성벽에는 ‘바늘귀’라고 불리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낙타가 무릎을 꿇고 짐을 모두 내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은 이처럼 힘겹게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설교 포인트가 선명하고 시각적으로 상상하기도 쉬운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고대의 근거는 없다.
작자 미상 · 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 (Drexelius 삽화) · Public Domain.
고대 문헌에는 없다
예루살렘에 “바늘귀 문”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1세기 문헌은 없다. 요세푸스의 방대한 예루살렘 묘사에도, 랍비 문헌에도, 로마 시대 지리 기록에도 이 이름의 성문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고학 발굴 역시 예루살렘 성벽에서 이런 용도의 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디서 왔는가. 2022년 폴란드 학자 Agnieszka Ziemińska가 New Testament Studies 68권 4호에 발표한 문헌 연구가 이 질문에 가장 세밀한 답을 제공한다. 그의 연구는 “바늘귀 문” 전설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기존에 통용되던 설명 — 11세기 비잔티움 주석가 테오필락트가 이 해석을 처음 제시했다는 오랜 통설 — 까지 수정한다.
안셀무스와 아퀴나스: 전설의 실제 경로
Ziemińska의 연구에 따르면, 성문 전설의 실제 출발점은 11세기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가 남긴 성경 난외주였다. 그 주석이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황금사슬(Catena Aurea)*에 인용되면서 라틴어 주석 전통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예수 시대 예루살렘의 건축학적 사실이 아니라, 중세 신학자들의 해석 노트에서 생겨난 이야기인 셈이다.
안셀무스의 인장 · Public Domain.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
마태복음 19장 24절의 헬라어 본문은 명확하다. κάμηλον(낙타)이 ῥαφίδος(바늘)의 τρήματος(구멍)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수 제작된 작은 문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제시하는 **과장법(hyperbole)**이다. 예수의 청중이었던 1세기 유대인에게도 이것은 문자적 묘사가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강조로 들렸을 것이다.
이 과장법은 24절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라고 놀라자, 예수는 26절에서 직접 결론을 내린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흐름에서 24절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낙타와 바늘은 인간의 가능성을 닫기 위한 장치다. 26절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선언이 그 불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의미가 살아난다. 낙타가 힘겹게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있었다면, 26절의 반전은 힘을 잃는다.
전설이 설교를 약하게 만들 때
“바늘귀 문” 이야기는 선한 의도에서 나왔다. 부자도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예수가 24절에서 만든 날카로운 불가능성을 희석하고, 결국 26절의 핵심 — 구원은 인간의 능력 밖이며 하나님의 일이다 — 을 약화한다.
전도서에서 자주 보이는 도덕적 노력 중심의 복음보다, 마태복음 19:24–26이 제시하는 역설이 더 급진적이다.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참고 자료
- Agnieszka Ziemińska, “The Origin of the ‘Needle’s Eye Gate’ Myth: Theophylact or Anselm?,” New Testament Studies 68, no. 4 (2022), Cambridge University Press
- Thomas Aquinas, Catena Aurea (황금사슬), ad Matt.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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