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알고 보니
불타버린 돌이 증언한 전쟁 — 메사 비문과 '오므리의 집'
1868년 8월, 요르단 디본(고대 모압의 수도) 인근에서 선교사 프레더릭 클라인(Frederick Augustus Klein)이 검은 현무암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34줄에 걸친 모압어 문자가 새겨진 이 비석은 곧 성서 고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밝혀진다. 그런데 이 비석은 학자들 손에 온전히 들어오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났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비문은 모압 왕 메사(Mesha)가 1인칭으로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승전 기념비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는 오랫동안 모압을 억압했다. 케모시(모압의 신)가 그 땅에 진노했기 때문이다.” 오므리와 그 아들(비문은 “그의 아들”이라 쓰지만 실제로는 손자 여호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고대 근동에서 “아들”은 후손 전체를 뜻하는 관용어였다)이 모압 땅 메드바를 40년간 지배했다는 서술이 이어진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 왕조(오므리 왕가)를 동시대 문헌에서 언급한 가장 방대한 기록이며, 여기 등장하는 “YHWH의 제단 기구들”(비문 17-18행, 메사가 이스라엘 성소에서 노획했다고 기록한 물품)은 성경 밖 문헌에서 이스라엘 신의 이름 YHWH가 등장하는 최초의 확실한 사례로 꼽힌다.
불로 깨진 비석
문제는 비석이 발견된 다음 해에 일어났다. 오스만 당국이 이 유물을 독일 측에 넘기라고 현지 바니 하미다(Bani Hamida) 부족을 압박하자, 1869년 부족은 반발의 표시로 비석을 불 속에 달군 뒤 찬물을 끼얹어 깨뜨리고 조각을 나눠 가졌다. 소유권을 둘러싼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 현지 부족 사이의 갈등이 유물 하나를 산산조각 낸 것이다.
다행히 프랑스 학자 샤를 클레르몽가노(Charles Clermont-Ganneau)가 파손 전 현지인을 통해 종이반죽 탁본(스퀴즈)을 이미 떠 둔 상태였다. 이 탁본은 완벽하지 않았다 — 탁본을 뜬 소년이 마르기도 전에 서둘러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클레르몽가노는 이후 흩어진 조각들을 대부분 수습했고, 탁본과 조각을 대조해 원래 약 1,000자였던 비문 중 613자를 복원해 냈다. 복원된 비석은 1873년부터 현재까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메사 비문(Mesha Stele), 현무암 승전 기념비, 기원전 9세기 중반 · 루브르 박물관(파리, AO 5066) 소장 · 사진: Mbzt, CC BY 3.0. 1869년 파손 후 탁본으로 복원된 실물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열왕기하 3장과 나란히 놓고 보면
열왕기하 3장은 오므리 왕조의 왕 여호람이 유다·에돔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모압 왕 메사를 치러 간 전쟁을 기록한다. 메사 비문은 같은 사건을 모압 쪽 시각에서 서술한다는 점에서 두 기록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다만 결말은 다르다. 열왕기하는 메사가 자신의 맏아들을 성벽 위에서 번제로 바치자 이스라엘 연합군이 철수했다고 전하는 반면, 비문은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했다”고 자축하며 끝난다. 승전비가 늘 그렇듯 메사의 기록에는 자기 진영의 승리를 극대화하는 수사가 섞여 있다 — 그러나 모압의 조공, 오므리 왕조의 억압,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는 기본 얼개 자체는 두 문헌이 독립적으로 일치한다.
흥미로운 각주 하나. 1994년 앙드레 르메르(André Lemaire)는 훼손된 31행에서 “베이트 다윗(다윗의 집)“이라는 표현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3). 이는 텔 단 비문과 더불어 다윗 왕조를 성경 밖에서 언급한 두 번째 사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재구성은 논쟁적이다 — 2019년 이스라엘 핀켈스타인, 나답 나아만, 토마스 뢰머는 같은 부분을 “발락”(민수기의 모압 왕)으로 읽어야 한다고 반박했다(Tel Aviv 46.1). 어느 쪽이 맞든, 이 논쟁 자체가 에피그래피 연구가 확실성과 신중함 사이에서 얼마나 정밀하게 움직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참고 자료
- James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3rd 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320–321
- J. Andrew Dearman, ed., Studies in the Mesha Inscription and Moab, Archaeology and Biblical Studie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 Scholars Press, 1989)
- André Lemaire, “‘House of David’ Restored in Moabite Inscription,”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3 (1994): 30–37
- Israel Finkelstein, Nadav Na’aman, and Thomas Römer, “Restoring Line 31 in the Mesha Stele: The ‘House of David’ or Biblical Balak?,” Tel Aviv 46.1 (2019):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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