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0:1-5 — 역사적 배경, 절별 주석, 설교사 수용사
성경 본문
시편 70:1-5
역사적·문화적 배경 · 절별 주석 · 설교사 수용사
시편 70:1-5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시편 70편의 문학적 위치: 다윗 시편집과 엘로힘 시편집
시편 70편은 시편집(Psalter)의 제2권(시 42-72편) 안에 위치합니다. 이 권은 흔히 '엘로힘 시편집'(Elohistic Psalter)이라 불리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로 '여호와'(יְהוָה, 야훼) 대신 '엘로힘'(אֱלֹהִים)을 사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편 70편은 다윗 시편집(다윗 귀속 시편들)에 속하지만, 시편 제1권의 신명기적(Deuteronomistic) 편집과는 어조와 단어 선택에서 조금 다릅니다. 본문비평(本文批評, 고대 사본들을 비교 검토하는 연구) 전통에서 이 시편은 시편 40:13-17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독립 시편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표제: '기념하게 하려고'와 레위기 2장의 연결
표제에 등장하는 '레하즈키르'(לְהַזְכִּיר, 기념하게 하려고)는 매우 특별한 예전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시편 38편의 표제에도 등장합니다('기념하게 하려고 다윗의 시'). 히브리어 동사 זָכַר(자카르, '기억하다/기념하다')의 히필(사역형, '~하게 하다') 부정사연계 형태로, 하나님이 기억하고 행동하시도록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뜻합니다.
사용자 추가요청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이 '기념'(레하즈키르)은 레위기 2장의 '기념물 부분'(אַזְכָּרָה, 아즈카라)과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레위기 2장은 소제(素祭,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 규정을 담고 있는데, 제사장이 밀가루·기름·향을 섞어 단 위에서 불사를 때 그 한 줌을 '아즈카라'(기념물 부분)라 부릅니다(레 2:2, 9, 16). 이 기념물 부분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기억되게 하는' 상징적 예전 행위였습니다. 랍비 유대 전통에서는 '아즈카라'를 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서원과 처지를 '기억하시게' 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시편 70편의 표제가 이 어근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 시편이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記憶)을 촉구하는 예전(禮典, 예배 의식) 행위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즉, 성전 예배에서 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 자체가 레위기 소제의 '기념물'처럼 하나님의 주의를 환기하는 기도의 제물로 기능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시편 70편과 시편 40편의 관계
시편 70:1-5는 시편 40:13-17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두 본문을 비교하면, 시편 40편은 훨씬 긴 시의 후반부(13-17절)인 반면 시편 70편은 그 부분만을 독립적으로 분리하여 별도의 시편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한 시편의 일부가 별도의 독립 시편으로 사용된 사례는 시편 57:7-11이 시편 108:1-5와 겹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두 본문의 차이점으로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시편 40:13에서는 '여호와여 기쁘게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시작하여 '여호와'(야훼)를 두 번 사용하지만, 시편 70:1에서는 엘로힘 시편집의 특성에 따라 '하나님이여(엘로힘)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로 달라집니다. 또한 시편 40:17b의 마지막 구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이시라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는 시편 70:5b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학자들은 시편 70편이 시편 40편에서 독립되었는지, 아니면 두 시편이 공통 전통에서 나온 별개의 시편인지를 논의해 왔습니다. 대체로는 시편 40편이 더 긴 원형(原型)이고 시편 70편이 예전적 필요에 따라 축약·독립된 것으로 봅니다. 예전 용도로 볼 때, 짧은 시편 70편은 성전 예배의 특정 절기나 상황에서 빠른 탄원 기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 탄원시의 장르와 구조
시편 70편은 구약 성경 탄원시(嘆願詩, Lament Psalm) 가운데서도 개인 탄원시(Individual Lament)의 전형적 구조를 보여 줍니다. 탄원시는 일반적으로 다음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①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Invocation), ②탄식과 문제 진술(Lament), ③신뢰 고백(Confession of Trust), ④간구(Petition), ⑤찬양 또는 찬양 서약(Vow of Praise). 시편 70편은 5절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요소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특히 1-2절의 긴박한 호소와 구원 요청, 3-4절의 원수들에 대한 간구, 5절의 의인 공동체를 향한 축복과 개인의 최종 탄원이 그것입니다.
시편의 '원수'(적대자) 이해
3-4절에 등장하는 '내 생명을 찾는 자들'(מְבַקְשֵׁי נַפְשִׁי, 므바케셰이 나프쉬), '나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들'(חֲפֵצֵי רָעָתִי, 하페체이 라아티),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은 시편 탄원시의 전형적인 '원수' 묘사입니다. 시편의 원수는 개인 시인(다윗 또는 의인)의 생명을 해치려는 구체적 적대자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비웃고 의인을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고대 근동 탄원 전통에서도 유사한 원수 묘사가 등장합니다. 아카드어(고대 바빌로니아어)로 쓰인 왕실 기도문이나 개인 기도문에서 탄원자는 종종 자신을 괴롭히는 적대자들을 나열하며 신에게 그들을 물리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고대 근동의 탄원 전통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문학에서 이와 유사한 탄원 기도 형식이 발견됩니다.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왕)의 왕실 비문들은 신에게 구원과 승리를 간구하는 구조를 담고 있으며, 원수들에 대한 수치 기원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다만 이들은 왕실의 군사적 승리를 위한 기도인 반면, 시편 70편은 개인 신앙인의 영적 탄원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스라엘의 탄원 기도는 고대 근동 문학의 형식을 공유하면서도, 야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뢰와 의탁이라는 독특한 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다윗의 저작과 시편의 역사적 상황
표제는 이 시편을 다윗의 것으로 귀속(歸屬, 어떤 시편이 누구의 것인지 명기하는 것)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시편이 다윗의 삶의 어떤 구체적 사건과 연관되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해석 전통에서는 시편의 다윗 귀속을 문자적 저작권의 문제보다 다윗 왕국의 언약적 대표성 안에서 이해합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표하는 언약 왕으로서 탄원의 전형적 목소리를 냅니다. 이 탄원은 단순히 역사적 다윗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이 연약함 중에 드리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됩니다.
시편 70:1-5 각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본 섹션은 각 절의 원어·문법 핵심과 주석적 논점을, 설교자가 강해 설교에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절별로 깊이 풀어냅니다. 시편 70편은 5절이지만, 표제(1절)가 독립적 의미를 가지므로 표제-본론(2-5절) 구조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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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 — 표제: '기념하게 하려고 다윗의 시, 총감독에게'
본문: לַמְנַצֵּחַ לְדָוִד לְהַזְכִּיר
직역: 총감독에게. 다윗의. 기념하게 하려고.
원어·문법 핵심: - לַמְנַצֵּחַ(라므나체아흐, '총감독에게'): 동사 נָצַח(나차흐, '감독하다/뛰어나다')의 피엘 능동분사에 전치사 ל('에게')가 붙은 형태. 시편 표제에 55회 등장하는 표준 예전(예배 의식) 지시어로, 성전 음악 책임자 또는 예배 인도자에게 이 시편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 לְהַזְכִּיר(르하즈키르, '기념하게 하려고'): 동사 זָכַר(자카르)의 히필(사역형) 부정사연계. '기억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라는 목적을 나타냅니다.
주석적 논의: 표제는 이 시편의 예전적 성격을 확립합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청교도 주석가)는 "이 시편이 '기억하게 하려고'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드린 기도를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드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통찰입니다. 기도는 반복을 통해 깊어지며, 같은 기도를 새로운 상황에서 드릴 때 더욱 깊은 신뢰가 형성됩니다.
사용자가 지적하신 것처럼, '레하즈키르'(לְהַזְכִּיר)는 레위기 2장의 '기념물'(아즈카라, אַזְכָּרָה)과 같은 어근(זכר)을 공유합니다. 레위기 2:2에서 소제(素祭) 중 태우는 '기념물 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도록 올려드리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이 시편을 성전에서 노래하는 것은 마치 기념물 제물을 올리듯 하나님의 주의를 환기하는 예전 행위였습니다. 즉, 시편 70편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예배 의식 안에서 드려지는 탄원이었던 것입니다.
설교적 함의: 기도는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13:15은 '찬미의 제사'를 언급하는데, 구약의 기념물 제물이 하나님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듯이, 신약의 기도도 하나님 앞에 우리를 '기념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회중에게 기도의 예전적 의미, 즉 공동 예배 안에서 함께 드리는 기도의 무게를 가르치는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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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 —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본문: אֱלֹהִים לְהַצִּילֵנִי יְהוָה לְעֶזְרָתִי חוּשָׁה
직역: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나를 도우러 속히 임하소서.
원어·문법 핵심: - אֱלֹהִים(엘로힘, '하나님이여'): 복수 형태이지만 단수 동사와 함께 쓰여 단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엘로힘 시편집(시 42-83편)에서 선호되는 하나님 호칭입니다. - חוּשָׁה(후샤, '서두르소서'): 칼(Qal, 기본형) 명령형으로, 극도의 긴박감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 약 17회 사용되는데, 대부분 긴급한 구원 요청 맥락입니다. - לְהַצִּילֵנִי(르하치레니, '나를 건지소서'): 동사 נָצַל(나찰, '건지다/구출하다')의 히필 부정사연계 + 1인칭 단수 접미사. '나를 빼앗아 내소서'라는 뜻으로, 적의 손아귀에서 강제로 구해 내는 이미지를 담습니다.
주석적 논의: 이 절의 핵심은 '서두르소서'(חוּשָׁה)라는 단어입니다. 탄원자는 이미 기다리고 기다렸으며,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는 극한 상황입니다. 알렉산더 맥라렌(Alexander Maclaren)은 이 시편을 주석하면서 '오 하나님이여 서두르소서'(O God, hasten)라는 외침이 탄원시의 본질적 정신을 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기도는 단순한 감사나 묵상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긴박하고 담대한 부르짖음입니다.
엘로힘과 여호와를 한 절에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 시편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엘로힘'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보편적 신 개념)이고,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탄원자는 이 두 차원의 하나님께 동시에 호소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엘로힘)와 '특별한 은혜'(여호와)의 통합을 기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설교적 함의: 성도는 긴박한 상황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신속한 임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례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속히 오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도가 줄어들거나 형식적이 될 때는 이 긴박함이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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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3-4 — 원수에 대한 기원: 수치와 패퇴
본문: 3: יֵבֹשׁוּ וְיַחְפְּרוּ מְבַקְשֵׁי נַפְשִׁי יִסֹּגוּ אָחוֹר וְיִכָּלְמוּ חֲפֵצֵי רָעָתִי 4: יָשׁוּבוּ עַל-עֵקֶב בָּשְׁתָּם הָאֹמְרִים הֶאָח הֶאָח
직역: 3절: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소서. 나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4절: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그들의 수치로 인해 돌아가게 하소서.
원어·문법 핵심: - מְבַקְשֵׁי נַפְשִׁי(므바케셰이 나프쉬, '내 생명을 찾는 자들'): 피엘 능동분사 복수 + '생명'의 연계형. '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라는 강렬한 표현입니다. - הֶאָח(헤아흐, '아하!'): 고대 히브리어에서 조롱과 경멸의 감탄사입니다. 이 단어는 에스겔서에서도 원수들이 패배한 이스라엘을 비웃을 때 사용됩니다(겔 25:3; 26:2). - יָשׁוּבוּ עַל-עֵקֶב(야슈부 알-에케브, '수치로 인해 돌아가게 하소서'): עֵקֶב(에케브)는 문자적으로 '발뒤꿈치'이지만 '결과로서/~때문에'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주석적 논의: 3-4절의 원수들에 대한 저주 기원(咀呪 祈願)은 현대 독자들에게 도덕적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해석 전통은 이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첫째,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향한 호소입니다. 탄원자는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로운 심판을 맡깁니다. 이것은 로마서 12:19의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는 원칙과 일치합니다. 원수를 향한 저주 기원은 개인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公義,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고 보상하심)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둘째, 이것은 공동체의 평화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원수들이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야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즉, 이 기원은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간구입니다.
시편 40:14-15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시편 40편에서는 원수 묘사가 조금 더 상세하지만, 시편 70편은 이를 간결하게 압축하면서도 핵심 신학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두 시편이 공유하는 이 원수 묘사는 다윗 시편 전통에서 형성된 표준적인 탄원 언어였습니다.
설교적 함의: 불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정의를 구하는 것은 신앙인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핵심은 원수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신뢰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토로하되, 그 결과를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는 신앙을 갖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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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 — '가난하고 궁핍한 나, 속히 오소서': 탄원의 클라이맥스
본문: וַאֲנִי עָנִי וְאֶבְיוֹן אֱלֹהִים חוּשָׁה-לִי עֶזְרִי וּמְפַלְטִי אַתָּה יְהוָה אַל-תְּאַחַר
교회 역사에서 시편 70:1-5은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나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는지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 시편 70편은 짧은 본문이지만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놀라운 예전적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2세기 교부부터 중세 수도원, 16세기 종교개혁, 19세기 강단까지 — 이 시편은 언제나 긴박한 탄원과 하나님 찬양의 언어로 기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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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교부 해석 (Patristic Interpretatio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 2세기 후반)
2세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시편 70:4의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하나님이 위대하시다'고 말하게 하소서"를 불멸의 하나님 찬양(a noble hymn of God)이라는 주제로 해석했습니다. 클레멘트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ANF 2권 337쪽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며 의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불멸하는 찬양이 된다고 말합니다. "의로움 안에 서 있는 불멸하는 인간, 그 안에 진리의 말씀이 새겨진 자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고귀한 찬양입니다." 클레멘트의 이 해석은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특징인 로고스 신학과 도덕적 변화의 관점을 반영합니다. 단순히 외부 사건의 도움을 구하는 탄원 기도가, 내면의 지혜와 의를 형성하는 영적 변화의 장으로 재해석됩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 354-430)
아우구스티누스는 NPNF 시리즈의 시편 주석(Expositions on the Book of Psalms)에서 시편 70편을 교회론적·역사적 틀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그는 637쪽에서 교회가 받는 박해의 역사적 변화를 이 시편과 연결합니다. 황제들이 박해하던 시대가 있었고, 그 후 황제들이 믿게 되자 교회가 높이 올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박해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이제 원수들의 공격은 육체적 핍박에서 내면의 생각(thoughts)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더 깊은 구덩이(a bottomless pit)"라고 보았습니다. 외적 박해는 보이기라도 하지만, 마음속 의심과 교만과 죄악된 생각이 성도를 안에서 갉아먹는 더 깊은 박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해석은 '전인교부 해석'(Totus Christus, 총체적 그리스도)의 관점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시편에서 기도하는 '나'를 다윗 개인이나 독자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 전체의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시편 70편의 탄원은 그러므로 모든 시대 교회가 연약함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공동의 기도가 됩니다.
개혁주의 수용: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적 해석은 개혁주의 언약 공동체 이해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언약 백성 전체가 '나'로 표현되며 함께 탄원하고 함께 찬양하는 구조가 바로 시편이 예전에서 사용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Cyril of Alexandria, 376-444)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은 그의 누가복음 주석에서 시편 70편의 언어를 구약 성도들이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의 표현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주석 542쪽에서 "많은 거룩한 선지자들이 이것들을 보기를 원했다"고 하면서, 그들이 '주의 자비를 나에게 보이소서, 주님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소서'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이 구원 간구는 시편 70편의 탄원과 동일한 언어입니다. 키릴에게 이 시편은 단순히 다윗의 긴급 기도가 아니라, 구약 성도들이 오실 메시아를 향해 드린 예언적 탄원이었습니다.
이 메시아적 해석은 §3 정경적-신학적 관점과 연결됩니다. 키릴의 입장은 히브리서 10장의 "보라 내가 왔나이다"(시 40:6-8 인용)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언어가 시편 40편과 70편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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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중세·수도원 전통: 성무일도의 여는 기도
시편 70편은 교회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예전적 위치를 점합니다. *베네딕도 성 규칙(Regula Benedecti*, Rule of Saint Benedict, 6세기)에서 성무일도(聖務日禱, Liturgy of the Hours)의 모든 기도 시간을 여는 기도로 지정된 것이 바로 시편 70:1의 라틴어 버전입니다:
> "Deus, in adiutorium meum intende. Domine, ad adiuvandum me festina."** >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여 속히 나를 도우러 오소서.')
베네딕도는 이 짧은 외침이 수도사들이 매 기도 시간을 시작할 때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탄원의 언어라고 보았습니다. 매일 7번의 기도를 이 외침으로 시작함으로써, 수도사는 하루 전체를 하나님의 신속한 임재에 대한 기대 안에서 삽니다. 이것은 6세기 이후 중세 교회 예배 구조의 근간을 이루어, 서방 기독교 전체가 이 시편의 언어로 기도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이 사용은 오늘날 장로교·개혁주의 예배에서 '예배 부름'(Call to Worship)이 회중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초청하는 기능과 유사합니다. 짧지만 근본적인 이 탄원 — '속히 도우소서' — 은 예배 시작의 마음 자세를 완벽하게 포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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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설교사·수용사 (Preaching History)
매튜 헨리 (Matthew Henry, 1662-1714, 청교도)
청교도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시편 70편을 '환란의 상태에 적합한 시편'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이 시편이 시편 40편에서 "거의 단어 그대로 복사된 것"이라고 하면서, '기억하게 하려고'라는 표제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헨리는 이 표제가 "이전에 유사한 상황에서 드렸던 기도를 새로운 감정으로 다시 드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매우 목회적인 통찰입니다. 기도는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같은 상황, 같은 고통이 반복될 때 우리는 이미 드렸던 기도를 새로운 신뢰로 다시 드릴 수 있습니다.
헨리는 이 시편의 구조를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①자기 자신을 위한 도움을(1, 5절), ②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수치를(2-3절), ③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기쁨을(4절) 간구합니다." 이 세 겹의 기도는 탄원자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원수를 위한 공의의 기원과 신앙 공동체의 기쁨을 함께 담습니다.
알렉산더 맥라렌 (Alexander Maclaren, 1826-1910, 19세기 침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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