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성서해석
화가들의 성서해석 ⑤ 렘브란트 — 「야곱의 축복」과 엇갈린 손
임종을 앞둔 늙은 야곱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뻗는다. 손자 요셉의 두 아들이 그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는데, 야곱의 오른손은 관례상 장자가 받아야 할 자리를 지나쳐 동생의 머리 위에 얹혀 있다. 렘브란트는 이 엇갈린 손을 극적인 대결의 순간이 아니라, 침상 곁의 나지막한 온기로 그렸습니다. 렘브란트 3부작의 두 번째 회차는 이 그림과, 그림 바깥에서 렘브란트가 실제로 유대인 이웃들과 맺었던 관계를 함께 읽습니다.
본문 — 창세기 48장
죽음을 앞둔 야곱은 이집트에서 아들 요셉을 불러들이고,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려와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요셉은 관례에 따라 장자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쪽에, 동생 에브라임을 왼손 쪽에 세웁니다. 그런데 야곱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세기 48:14)
요셉이 아버지의 눈이 이미 침침해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 여겨 손을 바로잡으려 하자, 야곱은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백성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세기 48:19)
이는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선택이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에 이어, 창세기는 다시 한번 맏아들의 권리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해 줍니다.
그림 분석 — 대결이 아니라 침상 곁의 손짓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야곱」, 1656년, 캔버스에 유채, 173×209cm — 게멜데갈러리 알테 마이스터, 빌헬름스회에성 박물관(카셀). 퍼블릭 도메인(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Mark 1.0).
렘브란트 이전의 도상 전통은 대체로 이 장면을 요셉과 야곱 사이의 실랑이, 곧 아버지의 “실수”를 아들이 바로잡으려는 긴장된 순간으로 그려 왔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 긴장을 걷어냅니다. 야곱은 침상에 반쯤 몸을 기댄 채 부드러운 표정으로 두 손을 얹고, 어린 에브라임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그 손길을 받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손목 가까이에 자기 손을 올리고 있는데, 이 손이 아버지의 손을 바로잡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그 뜻을 받아들이고 지그시 얹혀 있는 것인지는 그림만으로는 분명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 이 모호함은 여러 미술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해 온 지점입니다. 화면 왼쪽, 침상 발치에 조용히 서 있는 여성 인물은 흔히 요셉의 아내 아스낫으로 해석되지만, 이 역시 확정적인 정체는 아닙니다.
빛은 야곱의 얼굴과 두 손, 그리고 축복받는 에브라임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는 렘브란트 특유의 짙은 갈색조 어둠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대결이 아니라 침상 곁의 나지막한 친밀함으로 이 장면을 그린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석입니다 — 창세기 본문이 전하는 “뜻밖의 역전”을, 렘브란트는 격렬한 사건이 아니라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건네는 조용하고 확신에 찬 몸짓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신학적 해석 — 장자권을 넘어서는 은총
창세기는 이 장면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관례나 서열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마엘 대신 이삭이, 에서 대신 야곱이 택함을 받았던 창세기 전체의 흐름이 이 마지막 세대에서도 반복됩니다 — 다만 이번에는 그 반복이 다툼이 아니라 축복하는 자의 확신 있는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야곱은 “내가 안다”고 두 번 반복해 말합니다. 이는 노쇠함으로 인한 착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관습적 서열을 넘어선다는 것을 그가 평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렘브란트가 이 장면을 대결이 아니라 침상 곁의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린 것은, 이 신학적 요점—은총은 강요되거나 다투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건네지는 것—을 그림의 형식 자체로 옮긴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와 유대인 이웃들 — 신화와 그 이후의 학계
렘브란트는 1639년부터 1650년대 후반 파산으로 집을 내놓기까지,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던 요덴브레이 거리(현재 렘브란트하위스 박물관) 인근에서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이 사실과 「야곱의 축복」·「유대인 신부」 같은 구약 소재 작품들이 맞물려, 20세기 이래 렘브란트를 “유대인을 사랑하고 존중한 화가”로 그리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이 서사를 훨씬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마이클 젤(Michael Zell, 보스턴 대학교)은 『렘브란트를 다시 보다』(Reframing Rembrandt, 2002)에서, 렘브란트가 속했던 개신교 지식인 서클—랍비 메나쎄 벤 이스라엘과 교류하던 이들—이 유대인에게 보인 관심이 순수한 인간적 애정이라기보다 유대인의 개종과 종말론적 기대가 뒤섞인 신학적 기획의 일부였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철학자 스티븐 내들러(Steven Nadler, 위스콘신 대학교)도 『렘브란트의 유대인들』(Rembrandt’s Jews, 2003)에서 이 “박애적 렘브란트” 신화와 실제 기록 사이의 간극을 짚습니다 — 예컨대 렘브란트의 작품 중 유대인 모델임이 확실히 고증된 초상은 1647년에 그린 이웃 의사 에브라임 부오노의 초상 한 점 정도로 매우 제한적입니다.
이 수정적 시각이 렘브란트의 구약 그림들이 갖는 힘을 깎아내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렘브란트가 유대인 이웃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은, 낭만화된 전설보다 훨씬 복잡하고 아직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학문적 논쟁의 영역이라는 것을 이 그림 앞에서 함께 기억해 둘 만합니다.
다음 편 예고
렘브란트 3편에서는 그가 회화·판화·소묘로 남긴 약 80점의 자화상 중 몇 점을 골라, 렘브란트가 자기 자신의 얼굴을 통해 성서적 자기이해—죄인이자 동시에 은총 입은 자로서의 자기 인식—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살펴봅니다.
이 글이 기댄 문헌
영미권
- Michael Zell, Reframing Rembrandt: Jews and the Christian Image in Seventeenth-Century Amsterda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 Steven Nadler, Rembrandt’s Jew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 퓰리처상 최종 후보작
- Simon Schama, Rembrandt’s Eyes (Alfred A. Knopf, 1999)
네덜란드 렘브란트 연구
- Ernst van de Wetering, Rembrandt: The Painter at Work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00)
그림 이미지는 Wikimedia Commons에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Mark 1.0)으로 등재된 스캔의 축소본(1280px)을 사용했습니다. 렘브란트와 유대인 이웃들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위 문헌들이 제기하는 수정적 시각을 따라, 단정적 결론 대신 학계의 논쟁 상태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위 문헌은 전부 실재하는 표준 연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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