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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성서해석

화가들의 성서해석 ④ 렘브란트 — 「탕자의 귀환」과 아직 끝나지 않은 용서

무릎을 꿇은 아들의 등에, 아버지의 두 손이 내려앉는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두 손이 서로 다르다 — 왼손은 크고 억세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아들의 어깨를 붙드는 듯하고, 오른손은 가늘고 부드럽게 아들의 등을 감싸듯 얹혀 있다. 카라바조 3부작이 빛과 촉각으로 신앙을 말했다면, 렘브란트가 인생 마지막 무렵 그린 이 그림은 그 두 손 하나에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전부를 담으려 합니다. 화가들의 성서해석 연재는 이제 렘브란트 판레인의 3부작으로 넘어갑니다.

렘브란트는 누구인가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은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태어나 20대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활동한, 네덜란드 황금시대(Dutch Golden Age)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초상화가로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1642년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과 이후 이어진 파산(1656년 공식 파산 선고), 잇단 자녀와 반려자의 죽음을 겪으며 말년에는 경제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카라바조가 명암을 극단적인 대비로 밀어붙였다면, 렘브란트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듯한 부드러운 빛의 층위(키아로스쿠로의 원숙한 활용)로 인물의 내면을 그렸습니다. 그는 회화·판화·소묘를 합쳐 약 80점의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도 유명한데, 이 자기응시의 습관은 뒤에 다룰 3편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탕자의 귀환」은 그의 말년, 1668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작으로, 렘브란트가 죽기 약 1년 전에 완성된 것으로 봅니다.

본문 — 누가복음 15장 11~32절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이 세 편의 “잃어버림” 비유(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 중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하게 탕진하고 돼지치기로 전락한 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아들이 준비해 온 참회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 신발을 가져오게 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엽니다. 그런데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밭에서 돌아온 큰아들이 잔치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나가 그를 달래지만 본문은 큰아들이 결국 들어갔는지 응답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그림 분석 — 두 손, 그리고 지켜보는 자

렘브란트 판레인, 「탕자의 귀환」, c. 1668년, 예르미타시 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장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 「탕자의 귀환」, c. 1668년, 캔버스에 유채, 262×205cm — 예르미타시 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 퍼블릭 도메인(Wikimedia Commons, PD-Art / CC0).

렘브란트는 비유의 절정, 곧 아들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는 순간을 택했습니다. 아들은 다 해진 신발 한 짝만 겨우 걸친 맨발에 삭발한 머리로 관객에게 등을 보인 채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 누더기가 된 옷과 초라한 신발이 그가 겪은 궁핍을 몸으로 증언합니다. 아버지는 반쯤 눈이 먼 듯한 얼굴로 아들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그의 등에 얹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널리 논의되는 지점은 바로 그 두 손의 비대칭입니다. 아버지의 왼손은 크고 근육질이며 손가락을 넓게 벌려 아들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는 반면, 오른손은 훨씬 가늘고 매끄러우며 손가락을 모아 부드럽게 아들의 등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아버지의 형상 안에 힘과 온유함, 부성과 모성을 함께 담은 장치로 읽는 해석은 헨리 나우웬의 묵상을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만 이를 렘브란트의 확정된 의도로 증명할 문헌은 없으므로, 작품이 허용하는 신학적 독법으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오른쪽에 반쯤 그늘진 채 서 있는 인물입니다. 붉은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이 인물은 흔히 큰아들로 해석되며, 무릎 꿇은 두 사람의 포옹을 팔짱을 낀 채 냉담하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인물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에 세워 둡니다 — 비유가 그의 반응을 끝내 서술하지 않은 채 열어 두었듯, 그림도 그의 다음 행동을 열어 둔 채 정지시킵니다.

신학적 해석 — 완결되지 않은 용서

이 그림이 하는 신학적 작업은 용서를 하나의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으로 그리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와 작은아들 사이의 포옹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그림의 오른쪽 절반은 그 화해가 아직 가족 전체의 화해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큰아들이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 동생을 끌어안을지, 아니면 끝내 문 앞에 서 있을지 — 렘브란트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그 답을 관객에게 넘깁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에 대한 유명한 묵상에서, 자신이 처음에는 이 그림을 무릎 꿇은 작은아들과 동일시하며 보았지만, 점차 자신 안의 분노에 찬 큰아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이 그림이 요구하는 자리가 아들이 아니라 두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씁니다 — 용서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용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 그림이 관객에게 던지는 최종적인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파산과 상실을 거듭 겪은 말년의 렘브란트가 이 장면을, 그것도 큰아들의 냉담함을 지워버리지 않은 채 그렸다는 사실은, 이 그림을 단순한 화해의 스냅샷이 아니라 인간이 용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오랜 성찰의 결과로 읽게 만듭니다.

다음 편 예고

렘브란트 2편에서는 「야곱의 축복」을 다룹니다. 임종을 앞둔 야곱이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며 두 손을 엇갈려 얹는 창세기 48장의 장면을 통해, 렘브란트가 유대인 이웃들과 맺었던 관계와 히브리 성서 도상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접근을 살펴봅니다.

이 글이 기댄 문헌

국내

  •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최종훈 옮김,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2009) — 이 그림 한 점을 주제로 쓴 전작(全作) 묵상록

영미권

  • Simon Schama, Rembrandt’s Eyes (Alfred A. Knopf, 1999)
  • Gary Schwartz, Rembrandt: His Life, His Paintings (Viking, 1985)
  • Christopher White, Rembrandt (Thames & Hudson, 1984)

네덜란드 렘브란트 연구

  • Ernst van de Wetering, Rembrandt: The Painter at Work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00) — 렘브란트 리서치 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를 이끈 대표 연구자의 저작

그림 이미지는 Wikimedia Commons에 퍼블릭 도메인(PD-Art)으로 등재된 스캔의 축소본(1280px)을 사용했습니다. 위 문헌은 전부 실재하는 표준 연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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