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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알고 보니

아브라함은 밭값을 세지 않고 달아 주었습니다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구하는 이야기다. 에브론과의 협상 끝에 아브라함은 막벨라 밭을 사기로 하고, 16절에서 그 값을 치른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가운데에 말한 대로 상인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한 단어가 눈에 걸린다. “달아.” 세어서 건네지 않고 ‘달아서’ 주었다. 왜 달았을까? 당시 세겔이 세어서 내는 화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전이 없던 시대의 거래

현대인에게 ‘세겔’은 이스라엘의 현대 화폐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래서 성경의 세겔도 동전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대에 동전은 아직 없었다.

주전 7세기 리디아(현재의 터키 서부)에서 처음 만들어진 금속 화폐가 페르시아·헬라 시대를 거쳐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주전 5~4세기 이후다. 그 이전 시대에 은(silver)은 동전처럼 세어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덩이나 조각 형태로 존재했고 저울로 무게를 달아 가치를 확인했다.

즉, 창세기의 세겔은 화폐 이름이 아니라 무게 단위였다.

히브리어가 말하는 것

히브리어 **שֶׁקֶל(세켈)**은 동사 שָׁקַל(샤칼), ‘달다’에서 파생된 명사다. 단어 자체가 저울 위에서 무게를 재는 행위와 직결된다. 창세기 23장 16절에서 “달아 주었다”는 표현도 같은 어근에서 나온다 — וַיִּשְׁקֹל(바이슈콜), “그리고 그가 달았다.”

즉,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은 400세겔을 지불하는 장면은 동전 400개를 세어 넘기는 것이 아니라, 은 덩이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400세겔의 무게에 해당하는 은을 달아 주는 장면이다.

유다 왕국의 저울추 434점

히브리어 어원이 이 사실을 시사한다면, 고고학이 그것을 실물로 보여 준다.

Raz Kletter는 유다 왕국 유적지에서 출토되어 목록화된 저울추 434점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Economic Keystones: The Weight System of the Kingdom of Judah (JSOT Supplement Series 276,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를 출간했다. 이 저울추들은 주로 주전 8~6세기, 즉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후 유다 왕국 시대의 유물이다.

연구 결과, 표준 세겔의 무게는 약 11.33g으로 확인된다. 434점의 저울추를 분석해 도출한 수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세겔의 세부 단위들이다. 출토된 저울추 중에는 다음과 같은 소단위들이 발견된다:

  • 베가(בֶּקַע): 반(½)세겔, 약 5.66g
  • 파임(פַּיִם): 3분의 2(⅔)세겔, 약 7.55g
  • 네체프: 6분의 5(⁵⁄₆)세겔

이 저울추들에는 히에라틱(Hieratic) 숫자가 새겨진 경우가 많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숫자 표기 체계가 가나안·이스라엘 무게 체계에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 주는 단서다.

‘상인의 세겔’이라고 명시한 이유

창세기 23장 16절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표현이 있다. “상인의 통용하는 대로(עֹבֵר לַסֹּחֵר, 오베르 라소헤르).” 아브라함이 단순히 은 400세겔을 달아 준 것이 아니라, 상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기준으로 달아 준 것이다.

이 표현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상황을 말해 준다. 무게 표준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성경에는 ‘상인의 세겔’ 외에도 ‘성소 세겔’(출 30:13; 레 27:25)과 ‘왕의 저울추’(삼하 14:26)가 따로 언급된다. 기준을 명시하지 않으면 어느 세겔로 달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환율이나 규격을 명시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이런 복수의 기준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거래 때마다 “어느 기준으로 달았는가”를 밝혀야 했다는 것은 고대 근동 경제의 실제 작동 방식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은을 달아 주는 장면 1728년 『성경 그림 해설(Figures de la Bible)』 삽화 (Gerard Hoet 외, P. de Hondt 출판, 헤이그) —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은을 달아 주는 장면 · Public domain.

저울 위에서 신뢰를 확인하던 시대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밭값을 치르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자. 두 사람 사이에 저울이 놓여 있다. 한쪽에는 은 덩이들이, 다른 쪽에는 표준 저울추들이 올라간다. 균형이 맞을 때 거래가 성립한다.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니라 무게로 신뢰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수천 년간 고대 근동 전역에서 작동했다. 성경이 은을 언급할 때마다, 그것은 동전이 아니라 저울 위에 올라가는 금속이었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밭을 사는 장면(렘 32:9-10)에도, 요셉을 노예로 판 대가를 은 20세겔로 받는 장면(창 37:28)에도 — 그 뒤에는 항상 저울이 있었다.

창세기 23장 16절을 다시 펼쳐 보자.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 그 한 동사 ‘달아’ 안에 저울과, 표준을 공유하던 문화와, 무게로 신뢰를 세우던 시대가 담겨 있다.

참고 자료

  • Raz Kletter, Economic Keystones: The Weight System of the Kingdom of Judah, JSOT Supplement Series 276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 창세기 23:16; 출애굽기 30:13; 레위기 27:25; 사무엘하 14:26; 예레미야 3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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