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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6 설교 준비 자료 — 역사적 배경, 절별 주석, 강해설교

성경 본문

이사야 12:1-6

역사적·문화적 배경 · 절별 주석 · 설교사 수용사

이사야 12:1-6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이사야가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로 이어지는 8세기 후반 유다 왕정 아래서 사역한 예언자라는 정황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한 대로입니다. 12장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이 배경 자체가 아니라, 그 배경 위에서 1장부터 11장까지 쌓아 온 고발과 심판과 소망의 긴 흐름이 왜 하필 이 짧은 여섯 절의 노래로 매듭지어지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아래에서는 12장에 특화된 배경, 곧 이 노래의 문학적 장르와 자리, 본문이 사용하는 시간·생활 이미지, 그리고 이 노래가 놓인 구체적 시대적 정황을 살핍니다.

심판의 노래에서 감사의 노래로 — 12장의 문학적 자리

18세기 이후 영어권 주석 전통은 일찍부터 12장을 하나의 독립된 문학 단위, 곧 "찬양과 감사의 노래"로 규정해 왔습니다. 존 길은 이 장의 서두에서 "이 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구원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담고 있으며, 앞 장(11장)은 그 노래가 응답하는 유명한 예언"이라고 요약하고, 본문이 교회의 이전의 불편했던 처지와 이제의 평안한 처지를 대조하는 데서 시작해 그리스도가 그 평안의 근거인 힘과 구원임을 고백하는 순서로 전개된다고 정리합니다.[bg1] 존 칼빈 역시 이 장 전체를 "이사야가 이제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감사를 권면한다"는 문장으로 열며, 이 노래가 단지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앞선 약속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회중 스스로의 입술로 확증하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말하자면 하나님이 미리 지어 회중의 입에 넣어 주신 "감사의 정형문"이라고 설명합니다.[bg2] 이 두 해석자가 공통으로 짚는 것은, 12장이 11장의 메시아적 평화 환상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응답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입니다 — 심판과 약속을 선포하는 긴 신탁 뒤에, 그 약속을 받는 회중이 자기 목소리로 응답하는 자리가 마련되는 구조입니다.

길은 이어서 이 노래의 세부 흐름을, 교회의 이전의 곤고함과 현재의 평안함을 대조하는 1절, 그리스도가 그 평안의 근거인 힘과 구원과 노래가 되신다는 고백에서 다른 이들도 그 풍성함에 참여하도록 권하는 2-3절, 그리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민 중에 선포하라는 상호 권면(4-6절)의 순서로 정리합니다.[bg1] 이 정리가 보여 주는 것은, 12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 — 개인의 고백이 회중의 상호 권면으로, 다시 만민을 향한 선포로 확장되는 흐름 — 을 따라 설계된 짧은 예배용 시라는 점입니다.

이런 "선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찬양"이라는 틀은 이사야서 안에만 머무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구약 시편 전승 전반에 나타나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최근 시편 89편 연구는 그 시가 개인적 확신의 언어와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에 대한 공동체적 기억을 한 본문 안에 결합하는 방식을 다루면서, 이런 결합이 시편 여러 곳에서 반복되는 신학적 수사 전략임을 보여 줍니다.[bg3] 이사야 12장이 1절의 지극히 개인적인 신뢰 고백("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에서 시작해 4-6절의 공동체적·만민을 향한 선포("그의 이름을 부르며", "온 땅에")로 확장되는 흐름도 이러한 구약 찬양시의 일반적 어법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 날에"의 재접합과 물 긷는 삶의 자리

"그 날에"라는 표지는 이미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가 즐겨 쓰는 종말론적 시간 공식이지만, 그때는 교만한 것들을 낮추는 심판의 시간표로 쓰였던 것과 달리, 12장의 두 "그 날에"(1절·4절)는 정반대로 진노가 돌이켜지고 회중이 감사와 선포로 응답하는 구원의 시간표로 쓰입니다. 같은 예언 관용구가 심판과 구원 양쪽 모두의 문을 여는 데 쓰인다는 사실은, 이사야에게 "그 날"이 재앙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침내 개입하시는 결정적 전환점을 가리키는 표지임을 보여 줍니다.

3절의 "구원의 우물들에서 즐거이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이미지도 유다 산지의 구체적 생활 조건 위에 서 있습니다. 강수량이 우기(대개 늦가을에서 초봄)에 집중되고 그 외 계절에는 지표수가 거의 없는 유다 산간 지역에서, 각 마을과 가정은 우기에 내린 빗물을 저수조(시스턴)에 모으거나 마을 인근의 샘·우물에 의지해 건기를 났습니다. 물 긷는 일은 대개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 정해진 시간에 반복되는 노동이었고, 우물가는 자연스럽게 마을 공동체가 모이고 소식이 오가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물을 긷는다"는 표현은 청중에게 추상적 은유가 아니라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생존 행위를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였고, 그 절박한 일상 행위에 "구원"이라는 신학적 무게를 얹음으로써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을 생수처럼 날마다 길어 쓸 수 있는 것으로 그려 냅니다.

웃시야·요담 시대의 상대적 번영과 앗시리아의 그림자

애덤 클라크는 이사야의 활동 시기를 개관하면서, 유다가 북쪽 열 지파의 반역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번영을 누린 것이 웃시야와 요담의 치세였다고 지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웃시야는 에돔인들이 요람 시대에 빼앗았던 홍해 연안의 항구 엘랏을 되찾는 등 대외적으로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bg4] 이런 상대적 안정과 번영이야말로 이사야가 사역을 시작한 배경이며, 동시에 1-11장이 거듭 경고하는 심판의 실제 위협 — 앗시리아 제국의 부상 — 이 아직 정면으로 닥치지 않은 시점의 정황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12장의 노래는 실제 역사적 재난이 완전히 지나간 뒤에 비로소 안도하며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임박한 위협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로 이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미리 붙들고 부르는 신앙의 노래라는 데 그 신학적 무게가 있습니다. 심판의 신탁이 먼저 선포되고 그 신탁이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는 자리에서, 회중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감사를 노래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참고 자료

  1. John Gill, *John Gill'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on Isa 12:1.
  2. John Calvin (tr. William Pringle),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vol. 1, on Isa 12:1.
  3. S. D. Ellison, "Singing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The Messianic Significance of Ps 89," *Old Testament Essays* 37 (2025): 1-19.
  4. Adam Clarke, *Adam Clarke's Commentary*, OT vol. 4 (Isaiah–Malachi), introductory summary to Isaiah.

이사야 12:1-6 각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본 섹션은 PD 주석서의 방법론, 원어 실측 데이터를 종합하여 각 절의 의미를 원어·문법 차원에서 다면적으로 밝히는 상세 주해입니다. 교부·설교사 전통은 §5에서 별도로 다룹니다.

12:1 — 진노가 돌이켜진 자리에서 터지는 감사

본문: וְאָמַרְתָּ בַּיּוֹם הַהוּא אוֹדְךָ יְהוָה כִּי אָנַפְתָּ בִּי יָשֹׁב אַפְּךָ וּתְנַחֲמֵנִי 직역: 그 날에 네가 말하리라 —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께서 내게 진노하셨으나 주의 진노가 돌이켜지고 주께서 나를 위로하셨나입니다.

원어·문법 핵심: - וְאָמַרְתָּ: 2인칭 남성단수 vav-연속 완료형 — 완료형이면서도 미래를 가리키는 예언적 확실성의 시제로, "그 날에"라는 종말론적 시간 표지와 결합해 아직 오지 않은 사건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서술합니다. 그레이(Gray)는 이 감사 정형구(אוֹדְךָ)가 이사야서 안에서는 드물게, 오직 구원의 절정에서만 등장한다고 지적합니다(ICC, 1912, p.350). - אָנַפְתָּ / אַפְּךָ: אנף 어근의 동사형과 명사형이 한 절 안에 나란히 반복되는 동족어 구문입니다. 이 어근은 코퍼스 전체 14회(신 4·시 4·왕상 2 등) 등장하며 언약 저주·왕정 심판 문맥에서 자주 쓰이는데, 여기서는 진노가 추상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처럼 구체적으로 되짚어집니다.

주석적 논의: 원인절(כִּי אָנַפְתָּ בִּי)과 결과절(יָשֹׁב אַפְּךָ וּתְנַחֲמֵנִי) 사이에 회개의 조건절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점이 신학적으로 중요합니다. 화자는 진노가 돌이켜진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 사실 자체를 감사의 근거로 삼으며, "감사하리이다"라는 결단이 이유보다 먼저 선언되는 어순 역시 감사가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즉각적 반응임을 보여 줍니다.

설교적 함의: 이 절의 문법이 보여 주는 것은 감사가 자기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돌이켜진 진노에 대한 즉각적 반응이라는 사실입니다. 위험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순간이나 두려운 고비를 넘긴 직후, 스스로를 점검할 여유도 없이 먼저 터져 나오는 안도와 감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절이 그리는 신앙의 첫 언어입니다. 오늘 예배에서 회중이 부를 감사는 자격을 다 따진 뒤의 감사가 아니라, 진노가 돌이켜졌다는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한 감사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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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 야 여호와, 나의 힘과 노래

본문: הִנֵּה אֵל יְשׁוּעָתִי אֶבְטַח וְלֹא אֶפְחָד כִּי עָזִּי וְזִמְרָת יָהּ יְהוָה וַיְהִי־לִי לִישׁוּעָה 직역: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나의 힘과 노래가 야 여호와이심이요 그가 내게 구원이 되셨음이라.

원어·문법 핵심: - אֶפְחָד: "두려워하다"(פחד 계열 어근, 두 니크쿠드 이형 합산 코퍼스 전체 약 75회 — 사 13회·시 14회·렘 7회 등)는 생존과 직결된 위협 앞에서 주로 쓰이는 감정 어휘입니다. - עָזִּי는 עֹז("힘/견고함")의 1인칭 접미형입니다. 어근 עֹז 자체는 코퍼스 전체 92회(시편 44·잠언 9·에스겔 8 등)로 이 여섯 절 가운데 가장 빈번한 어근이며, 출애굽기 15:2·15:13의 홍해의 노래에도 동일 어근이 등장합니다.

주석적 논의: 그레이는 MT 일부 사본이 יָהּ 뒤에 יְהוָה를 덧붙인 이중 신명을 전하지만 칠십인역과 출애굽기 15:2에는 없다고 지적합니다(ICC, p.349-350). "보라"로 열리는 이 절은 신뢰와 두려움 없음을 나란히 놓아 하나의 내적 상태를 두 각도에서 서술하며, "힘"과 "노래"를 접속사 없이 한 신명에 귀속시켜 그 둘이 하나님 안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문법으로 보여 줍니다.

설교적 함의: 힘과 노래가 갈라지지 않는다는 이 절의 문법은, 위험 앞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과 감사와 찬양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가 서로 다른 두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임을 보여 줍니다. 경계 근무나 작전 중 마음이 얼어붙는 순간, "나의 힘"을 구하는 기도와 "나의 노래"를 구하는 기도는 실은 같은 기도입니다. 오늘 이 자리의 예배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함과 찬양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이미 하나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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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 구원의 우물에서 긷는 기쁨

본문: וּשְׁאַבְתֶּם־מַיִם בְּשָׂשׂוֹן מִמַּעַיְנֵי הַיְשׁוּעָה 직역: 너희가 구원의 우물들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으리라.

원어·문법 핵심: - וּשְׁאַבְתֶּם: שאב 어근의 2인칭 남성복수 완료형 — "물을 긷다"는 코퍼스 전체 19회 가운데 다수가 창세기 24장 우물가 장면에 몰려 있어, 낯선 은유가 아니라 매일의 생존 노동을 곧바로 떠올리게 하는 일상 어휘입니다. - שָׂשׂוֹן("기쁨")은 코퍼스 전체 22회(렘 7·사 6·시 5 등) 등장합니다. מַעְיָן("샘")은 전체 23회(시 5·잠 3·사 2 등)입니다. יְשׁוּעָה("구원")는 전체 77회(시 45·사 19 등)로, 이사야서 신학의 핵심 어휘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석적 논의: 완료형(וּשְׁאַבְתֶּם)이면서도 문맥상 미래의 반복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은 구원이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 되풀이해 길어 쓸 자원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읽기는 이 우물을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시해 요한복음 1:16의 "충만함에서 길어 쓴다"는 언어와 연결짓기도 합니다. "구원의"(הַיְשׁוּעָה)에 붙은 정관사는 이 우물이 유일하게 특정된 원천임을 문법적으로 못박습니다.

설교적 함의: 매일 반복되는 순찰과 경계, 끝나지 않는 임무의 리듬 속에서 이 절은 구원을 하루에 한 번 크게 감동받고 마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 새로 길어야 할 물처럼 그려 줍니다. 오늘 하루도 두려움이 마르지 않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구원의 우물에서 다시 물을 길어야 할 자리입니다. 신앙은 한 번의 체험으로 완결되지 않고, 날마다 같은 샘으로 되돌아가는 반복된 발걸음으로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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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 만민을 향한 선포의 명령형

본문: וַאֲמַרְתֶּם בַּיּוֹם הַהוּא הוֹדוּ לַיהוָה קִרְאוּ בִשְׁמוֹ הוֹדִיעוּ בָעַמִּים עֲלִילֹתָיו הַזְכִּירוּ כִּי נִשְׂגָּב שְׁמוֹ 직역: 그 날에 너희가 말하리라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라, 그 행하심을 만민 가운데 알게 하라, 그 이름이 높으심을 기억하게 하라.

원어·문법 핵심: - הוֹדוּ / קִרְאוּ / הוֹדִיעוּ / הַזְכִּירוּ: 남성복수 명령형 네 개가 접속사 없이 나란히 쌓이는 구문입니다. 뒤의 둘(הוֹדִיעוּ, הַזְכִּירוּ)은 히필(사역) 어간이어서 "스스로 알라"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알게 하라"는 뜻입니다. - עֲלִילָה: "행하심/행적"을 뜻하며 코퍼스 전체 24회(시 9·겔 8·습 2 등)로, 시편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리킵니다.

주석적 논의: 앞의 두 명령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 행위라면 뒤의 두 명령은 만민(בָעַמִּים)을 향한 선포 행위이며, 접속사 없는 배열은 예배와 선포가 한 호흡 안의 한 행동임을 보여 줍니다. 승전이나 공적을 만민에게 널리 선포하는 관용구는 고대 근동 왕실 비문에도 널리 나타나는데, 신아시리아 시대 아슈르바니팔 왕실 비문(Ashurbanipal 086)류의 정복 기사도 업적을 기뻐하며 선포하는 정형화된 어법을 사용합니다. 이 배경에서 볼 때 4절의 "만민 중에 알게 하라"는 명령은 그런 왕실 자기과시의 수사를 전유해, 그 대상을 왕이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려놓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이사야 12:1-6은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나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는지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교부시대의 해석

이사야 12장에 대한 교부 시대의 직접적 주석은 매우 드뭅니다. 남아 있는 흔적은 본문을 체계적으로 강해한 결과가 아니라, 변증과 강론 속에서 스치듯 인용되거나 반향된 짧은 순간들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몇 안 되는 흔적은 초대 교회가 이 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읽어 나갔는지 그 궤적을 보여줍니다.

2세기 변증가 유스티누스 순교자는 구약이 말하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와 동일시하는 해석 방법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어 예슈아(구원)와 예수라는 이름 사이의 발음적 유사성을 근거로, 시편과 이사야 등 여러 본문에 흩어진 "구원"·"구주"라는 낱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킨다고 논증합니다.[pat1] 이런 독법의 틀 안에서라면 12:2의 "그는 나의 구원이시로다"라는 고백은, 유스티누스가 다른 곳에서 즐겨 펼치는 논증과 같은 결의 자료로 자연스럽게 편입될 법한 본문입니다. 다만 남아 있는 발췌 자체는 이사야 12장을 명시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으므로, 이는 그의 해석 방법론이 이 본문에 적용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는 정도로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3세기의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는 한 강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주께서 네 가운데서 다스리신다"고 외치는 대목을 남겼습니다.[pat2] "주께서 네 가운데 계신다"는 이 선포의 구조는 12:6의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의 중에서 크심이니라"가 시온을 향해 던지는 부름과 정확히 같은 신학적 문법—공동체를 향해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라는 명령형—을 공유합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이사야 12장을 직접 겨냥해 이 강론을 썼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지만, 그가 이 오래된 예언적 어법을 자기 시대의 강론에 그대로 되살려 썼다는 사실 자체가, 시온을 향한 이 절정의 부름이 교회 강론 전통 속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반복되어 온 언어였는지를 보여줍니다.

해석의 흐름

두 흔적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궤적이 드러납니다. 유스티누스는 12:2의 "구원"이라는 낱말 자체를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읽어 내는 명명론적·그리스도론적 독법을 대표하고, 그레고리우스는 12:6의 "네 가운데"라는 임재 언어를 교회를 향한 강론적 선포로 되살리는 목회적 전유를 대표합니다. 두 방향 모두 본문의 개별 단어나 절을 정밀하게 주석하기보다, 노래 전체가 품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취의 울림을 자기 시대의 신앙 언어로 옮겨 놓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는 후대 교회가 이사야 12장을 절기력 속 감사와 성찬 전례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되는 흐름의 이른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가 얇다는 사실 자체도 의미가 있습니다—이 본문은 교부들에게 논쟁적 정의(定義)의 전장이 아니라, 이미 합의된 구원 고백을 예배 언어로 되풀이해 쓰는 자리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사의 수용

청교도와 웨슬리의 전통(17~18세기). 매튜 헨리는 본문을 개인적 감사(1, 3절)와 공동체적 찬양(4~6절)의 이중 구조로 읽어, "감사는 골방의 일이면서 동시에 회중의 일"이라는 목회적 원리를 이끌어냅니다. 존 웨슬리는 특유의 간결한 주석에서 구원의 주체를 분명히 못 박습니다. "나의 구원은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rh1] ("My salvation hath not been brought to pass by man, but by the almighty power of God.") 짧은 한 문장으로 2절의 "그는 나의 구원이시로다"가 인간의 어떤 성취도 끼어들 수 없는 순전한 은혜 고백임을 확정합니다.

찰스 스펄전의 목회적 적용(19세기). 1870년 5월 1일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에서 행한 설교 "새 마음을 위한 새 노래"에서 스펄전은 1절의 배경을 산헤립 침공의 위협과 연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것이 그 뜻이라면, 이는 거룩하게 하시는 고난의 한 사례입니다. 우리가 매를 맞아 아플 때마다, 그 매가 거두어질 때를 바라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rh2] ("If this is the meaning of it, it is an instance of sanctified affliction... whenever we smart under the rod, we may look forward to the time when the rod shall be withdrawn.") 진노가 돌이켜지는 경험을, 고난 자체를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끝에 위로가 있음을 붙드는 목회적 언어로 풀어냅니다.

알렉산더 매클라렌의 주제적 설교(19세기). 매클라렌은 3절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만을 따로 떼어 "구원의 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며, 이 이미지를 광야의 반석 사건(출 17장)과 초막절 관수 의식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긴 궤적 속에 놓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을 낸 것은 반석도 지팡이도 모세와 장로들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rh3] ("It was not the rock, nor the rod, nor Moses and the elders, but the presence of God that brought the refreshing draught.") 광야의 물 사건을 다시 불러내어, 12:3의 기쁨이 곤핍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임재의 결과임을 드러냅니다.

수용사 흐름

세 세기에 걸친 강해는 하나의 공통된 강조점으로 수렴합니다. 웨슬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 못 박고, 스펄전이 진노의 뒤편에 감추어진 위로를 붙들며, 매클라렌이 반석이 아니라 임재가 물을 낸다고 선언할 때, 세 설교자 모두 본문의 중심 동력을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에 놓습니다. 시대가 청교도의 교리적 정밀함에서 부흥기의 목회적 위로로, 다시 빅토리아 시대의 주제적 강해로 옮겨가는 동안에도, 이 노래가 가르치는 핵심—구원은 받는 것이지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반복해서 재확인되었습니다. 오늘의 강단이 이 본문을 붙들 때도 같은 궤적 위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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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 유스티누스 순교자, in *Ante-Nicene Fathers* 제1권(ed. Philip Schaff), 743쪽.
  2.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 in *Ante-Nicene Fathers* 제6권, 692쪽.
  3. 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Whole Bible*, 사 12:2 주석.
  4. C. H. Spurgeon, "A New Song For New Hearts" (No. 928), *Spurgeon's Sermons* 제16권(1870), 1870년 5월 1일 설교.
  5. Alexander MacLaren, "The Well-Spring of Salvation," in *Expositions of Holy Scripture: Isaiah and Jer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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