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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1-6, 38-44 중심) 설교 준비 자료 — 역사적 배경, 절별 주석, 강해설교

성경 본문

요한복음 11:1-44(1-6, 38-44 중심)

역사적·문화적 배경 · 절별 주석 · 설교사 수용사

요한복음 11:1-44(1-6, 38-44 중심)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이번 장의 무대는 갈릴리 호숫가를 떠나 예루살렘 인근으로 옮겨 갑니다. 앞선 표적들이 넓은 군중과 회당 논쟁을 배경으로 펼쳐졌다면, 이번 사건은 한 가정의 좁은 반경 안에서 일어나며, 그 지리적·사회적 근접성 자체가 사건의 전개에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지리적 인접성

본문은 베다니를 예루살렘에서 "스다디온 열다섯쯤" 되는 거리로 밝힙니다(11:18) — 오늘날 단위로 약 3km, 걸어서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입니다. 이 근접성은 서사 전개에 실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손쉽게 베다니까지 와서 자매를 위로할 수 있었고(11:19, 31),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역시 그만큼 빠르게 예루살렘 지도층의 귀에 들어가 공회 소집으로 이어집니다(11:46-47). 베다니가 감람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었다는 지리적 정보는[arch1] 이 사건이 예루살렘 권력 중심부의 눈과 귀가 미치는 거리 안에서 벌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전을 마주 보는 능선으로, 순례객들이 절기마다 넘나들던 길목이었고 베다니는 그 동쪽 비탈에 자리해 예루살렘을 오가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경유지·숙박지 구실을 했습니다. 뒤이은 12장의 향유 부음과 예루살렘 입성 역시 같은 마을을 거점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베다니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 마지막 국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배후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근접성은 또한 예수님이 굳이 유대로 "다시" 가시겠다고 하실 때 제자들이 보인 두려움(11:8)을 한층 실감 나게 만듭니다 —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사실상 한 생활권에 속한 곳이었으므로, 그곳으로 가는 것은 곧 얼마 전 돌을 들어 치려던 그 적대적 군중의 활동 반경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두 자매와 한 남매의 가정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마리아·나사로 남매는 남편이나 아버지에 대한 언급 없이 독자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마르다가 집안일을 주관하고 손님을 맞는 역할을 하는 모습(11:20, 눅 10:38-42과의 병행)은 그녀가 가정의 실질적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결혼하지 않았거나 과부가 된 여성이 형제와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던 당시 사회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서술(11:2, 12:3에서 구체화됨)은 이 가정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를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은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맞먹는 값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은 예수님과 이 가정의 관계가 단순한 지인 이상의 깊은 친분과 물질적 환대의 관계였음을 뒷받침하며,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라"(11:5)는 내레이터의 직접 진술과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1세기 유대 장례·애도 관습

팔레스타인의 더운 기후 때문에 시신은 대개 사망 당일, 늦어도 다음 날 안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시신은 씻긴 뒤 향료를 바르고 삼베 조각(κειρίαι)으로 수족을 동이고 얼굴은 별도의 수건(σουδάριον)으로 덮어 가족 소유의 바위굴 무덤에 안치한 뒤 돌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 본문 11:44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절차입니다. 무덤은 대개 마을 인근 언덕에 굴을 파거나 자연 동굴을 다듬어 만들었고, 한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사용하는 가족 무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례 이후에는 강도 높은 애도 기간이 이어졌는데, 특히 처음 사흘은 가장 격한 애곡의 시기로 여겨졌고 이웃과 친지들이 찾아와 함께 곡하는 것이 관습이었으며, 형편이 되는 집안에서는 곡하는 이들을 따로 청해 조가를 부르게 하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위로하러 온 유대인들"이 마리아를 따라 무덤으로 가며 우는 장면(11:31, 33)은 이런 관습적 조문 문화를 배경으로 하며, 예루살렘에서 온 많은 이들이 며칠째 이 가정에 머물며 애도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애도는 사흘의 격렬한 단계를 지나 이레, 나아가 한 달까지 점차 완화되는 단계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 흐름이었습니다.

후대 랍비 전통에 보존된 통념에 따르면 영혼이 사흘 동안은 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며 혹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살핀다고 여겨졌으며, 나흘째부터는 육체의 부패가 뚜렷해져 그 가능성마저 완전히 사라진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이 통념 위에서 볼 때 나흘째라는 시점은 단순한 시간 경과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유된 "돌이킬 수 없음"의 심리적 경계선이었습니다. 마르다가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한 것(11:39)은 바로 이 경계를 확인해 주는 발언으로, 더 이상 소생을 기대할 여지가 없다는 통념적 확언이자, 동시에 예수님이 무덤을 열게 하시는 순간의 극적 긴장을 극대화하는 서사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공관복음에 기록된 다른 소생 사건들 —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35-43)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1-17) — 이 모두 사망 직후, 곧 장례 절차가 진행되기 이전 시점에 일어난 것과 비교할 때, 나사로 사건은 이런 관습적 시간표를 완전히 지나 애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뒤에 일어난 것이어서 소생이 아니라 명백한 죽음 이후의 부활로 구분됩니다.

고고학적 증거

베다니(Bethania) — 감람산 기슭, 예루살렘 인근에 위치한 마을로 확인됩니다.[arch1] 별도의 발굴 보고는 남아 있지 않지만, 지리 좌표 확인을 통해 본문이 명시한 예루살렘과의 근접성이 실제 지형과 부합함이 확인됩니다.

유대(Iudaea) 속주 — 서기 6년, 헤롯 아르켈라오스의 분봉령이 로마의 직접 통치 아래로 편입되면서 성립된 로마 속주입니다.[arch2] 이 정치적 배경은 사건 직후 공회가 로마인들이 이 민족의 땅과 지위를 빼앗아 갈 것을 우려하는 발언(11:48)의 현실적 무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유대는 이미 자치권이 아니라 로마 총독의 감독 아래 놓인 속주였고, 소요의 소지가 있는 대중적 사건은 곧바로 로마의 개입을 부를 수 있는 정치적 위험이었습니다. 바르 코크바 항쟁(132-135) 이후에야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속주의 이름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으므로, 본문의 시점에서는 여전히 유대라는 명칭과 정체성이 지역민들에게 온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1. *Wikipedia*, s.v. "Bethany" (지리 정보 확인).
  2. Roger S. Bagnall, "Iudaea," in *The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2018), 3634–3636.

요한복음 11:1-44(1-6, 38-44 중심) 각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본 섹션은 44절 전체를 다루되, 신학적 무게가 가장 큰 다섯 대목(1-6, 17-27, 33-35, 38-40, 41-44)은 원어·문법·주석적 논의를 펼치고, 그 사이 절들은 흐름요약으로 묶습니다.

11:1-6 — 나사로의 병듦과 예수님의 지체

본문: Ἦν δέ τις ἀσθενῶν, Λάζαρος ἀπὸ Βηθανίας... ἀπέστειλαν οὖν αἱ ἀδελφαὶ πρὸς αὐτὸν λέγουσαι· Κύριε, ἴδε ὃν φιλεῖς ἀσθενεῖ....Αὕτη ἡ ἀσθένεια οὐκ ἔστιν πρὸς θάνατον ἀλλ᾽ ὑπὲρ τῆς δόξης τοῦ θεοῦ... ἠγάπα δὲ ὁ Ἰησοῦς τὴν Μάρθαν καὶ τὴν ἀδελφὴν αὐτῆς καὶ τὸν Λάζαρον....τότε μὲν ἔμεινεν ἐν ᾧ ἦν τόπῳ δύο ἡμέρας.

직역: 병든 자가 있었는데, 베다니 사람 나사로였습니다. 자매들이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소서 당신이 사랑(필레오)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병은 죽음을 향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아가파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그때 계시던 곳에 이틀을 그대로 머무셨습니다.

원어·문법 핵심: ἀσθένεια(약함)를 4절에서 예수님이 그대로 받아 "죽음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재정의하시며, ὃν φιλεῖς(3절)와 ἠγάπα(5절)는 같은 인물을 향해 애정 동사 두 개가 겹쳐 쓰여 사랑이 감정과 의지 둘 다임을 드러냅니다. ἔμεινεν... δύο ἡμέρας는 부정과거로, 우유부단이 아니라 계산된 지체임을 문법이 뒷받침합니다.

주석적 논의: 이 여섯 절은 본문 전체의 열쇠를 미리 쥐여 줍니다. 4절의 재정의 문장은 병의 결과가 아니라 목적(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하여 나사로의 병을 처음부터 계시적 사건으로 틀 짓고, 5-6절의 "사랑하셨다 그러므로(οὖν) 머무셨다"는 접속 구조는 사랑이 지체의 근거가 됨을 문법적으로 못 박아 사랑=즉각 개입이라는 통념을 뒤흔듭니다.

설교적 함의: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표대로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으며, 그 침묵이 무관심의 증거는 아닙니다. 오늘의 명제는 "주님의 지체는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더 큰 영광을 준비하시는 사랑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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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10 — 제자들의 만류와 낮의 비유 (흐름요약)

제자들은 최근 돌로 치려 한 지역으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합니다(8절) — 예수님은 10:40의 "요단강 건너편"(고고학적으로 베다니와 별개인 요단 동편 정착지)에 계셨으므로, 유대 귀환은 안전지대를 벗어난 실제적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임을 상기시키며(9-10절) 낮에 걷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으나 밤에 걷는 자는 넘어진다고 하시고, φῶς(빛, 1:4-9·8:12·9:5와 연결)로 정해진 때의 순종이 위험 계산보다 안전하다는 역설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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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6 — 잠들었다는 비유와 도마의 결단 (흐름요약)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κεκοίμηται("잠들었다")로 완곡히 표현하시지만 제자들은 문자적으로 오해하고(12-13절),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고쳐 말씀하십니다(14절). 가장 인상적인 반응은 도마의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로, 훗날의 의심 많은 도마상(20:24-29)과 대조적인 거친 충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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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27 — 마르다의 신앙고백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본문: Ἐλθὼν οὖν ὁ Ἰησοῦς εὗρεν αὐτὸν τέσσαρας ἤδη ἡμέρας ἔχοντα ἐν τῷ μνημείῳ... εἶπεν οὖν ἡ Μάρθα πρὸς τὸν Ἰησοῦν· Κύριε, εἰ ἦς ὧδε οὐκ ἂν ἀπέθανεν ὁ ἀδελφός μου...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κἂν ἀποθάνῃ ζήσεται, καὶ πᾶς ὁ ζῶν καὶ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οὐ μὴ ἀποθάνῃ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πιστεύεις τοῦτο;...Ναί, κύριε, ἐγὼ πεπίστευκα ὅτι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직역: 예수께서 오셔서 그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된 것을 보셨습니다... 마르다가 말하되, 주여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주여 그러하외다, 나는 주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나입니다.

원어·문법 핵심: τέσσαρας ἤδη ἡμέρας("이미 나흘")는 사흘째까지 혼이 시신 곁을 맴돈다는 통념상 그 가능성마저 배제된 시점을 가리키며, 39절 "냄새가 나나이다"와 직결됩니다.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는 표적에 앞서 주어지는 해석 틀로서 독특합니다 — 마르다가 부활을 "마지막 날"의 미래 교리로 이해한 데 대해, 예수님은 그것이 지금 현존하는 실재임을 선언하십니다.

주석적 논의: 마르다의 항변은 원망이 아니라 신앙과 좌절이 뒤섞인 정직한 고백입니다. 다만 마르다의 신앙은 정적입니다 — 부활을 먼 교리로 밀어 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를 인격적 현재로 끌어당깁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인격적 신뢰의 자리로 부르는 질문이며, 마르다가 부활 명제가 아니라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고백으로 응답한다는 사실은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믿음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설교적 함의: 마르다처럼 우리도 부활을 먼 교리로만 붙들고 오늘의 상실 앞에서 무력해질 때가 많습니다. 강단에서 던질 질문은 마르다에게 던져진 그 질문과 같습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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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32 — 마리아를 부르심과 동일한 고백 (흐름요약)

마르다는 돌아가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은밀히 전합니다(28절).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며 마르다와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항변합니다(32절) — 두 자매가 함께 곱씹어 온 공통된 탄식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마르다는 서서 신학적 대화를 나눈 반면 마리아는 엎드려 몸으로 슬픔을 표현하며, 이 몸짓 차이는 이어질 33절 예수님의 격동을 예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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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3-35 — 예수님의 격동과 눈물

본문: Ἰησοῦς οὖν ὡς εἶδεν αὐτὴν κλαίουσαν καὶ τοὺς συνελθόντας αὐτῇ Ἰουδαίους κλαίοντας, ἐνεβριμήσατο τῷ πνεύματι καὶ ἐτάραξεν ἑαυτόν, καὶ εἶπεν· Ποῦ τεθείκατε αὐτόν; λέγουσιν αὐτῷ· Κύριε, ἔρχου καὶ ἴδε.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직역: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격동하시고 자기 자신을 뒤흔드시며 말씀하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주여 와서 보소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원어·문법 핵심: ἐνεβριμήσατο(ἐμβριμάομαι)는 억누르기 힘든 격한 감정을 가리키는 동사로, 마태·마가복음에서는 대체로 엄히 명하거나 분개하는 문맥에 등장해 단순한 "마음 아픔"보다 강도가 높습니다. ἐδάκρυσεν(δακρύω, 눈물을 흘리다)은 31·33절의 κλαίω(대성통곡)와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로, 예수님의 눈물이 주변의 격한 애곡과는 결이 다른 절제된 슬픔임을 드러냅니다.

교회 역사에서 요한복음 11:1-44(1-6, 38-44 중심)은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나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는지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5.1 교부 해석 전통 (Patristic Interpretation)

> 본 섹션은 초기 교회(4-5세기) 교부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읽고 해석했는지, NPNF 문헌을 바탕으로 제시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 4세기 (니케아 시대)

크리소스톰은 『요한복음 강해』 제62-64강에서 나사로 내러티브를 다룹니다. 제62강(11:1-2)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도 병들고 고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음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제63강(11:30-31)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다른 반응을 두 자매의 신앙 기질 차이로 읽으며, 제64강(11:41-42)은 예수의 감사 기도를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둘러선 무리의 믿음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해석합니다. 크리소스톰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말과 행동은 청중의 구원을 겨냥합니다.[pat1]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 5세기 (교부시대 후기)

카시아누스는 고난을 구분하는 신학적 논의에서 요한복음 11:4을 중심 논거로 인용합니다. 다단·아비람·고라의 죽음(민 16장) 같은 죄에 대한 즉각적 심판과, 나사로의 병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을 구분함으로써, 눈앞의 질병과 시련을 성급히 죄의 형벌로 단정하지 말라는 목회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pat2]

해석의 흐름 — 초기 교회 전통의 형성

안디옥의 크리소스톰은 강해 설교자의 눈으로 등장인물 각자의 심리와 신앙의 결을 추적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언제나 청중의 구원을 향한다는 목적론적 독법을 세웠습니다. 서방 수도원 전통의 카시아누스는 같은 본문을 고난의 신학적 유형론을 세우는 논거로 사용해, 모든 고난이 죄의 즉각적 형벌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허락되는 고난이 따로 있음을 논증했습니다. 강조점은 다르지만 두 흐름은 하나의 골격을 공유합니다 —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벌이 아니라 계시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은 인간이 가장 무력한 자리에서 드러난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이후 교회가 고난과 질병을 대하는 목회적 태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묻기보다,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자리가 있는지를 먼저 묻는 태도입니다.

5.2 설교사·수용사

> 본 섹션은 청교도 시대부터 근대 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이 본문이 교회사에서 어떻게 설교·해석되어 왔는지 연대순으로 제시합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 17-18세기 (청교도)

헨리는 예수님의 눈물(11:35)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작동하는 순간으로 읽으면서도, 그것을 값싼 감상과 구별합니다. 이어 돌을 옮기라는 명령(11:39)을, 사람이 감당할 일은 사람이 하고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 — 생명을 주시는 일 — 은 하나님께 맡기는 협력의 원리로 풀어냅니다. > "동정의 눈물은 그리스도의 눈물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어낸 이야기 앞에서만 눈물짓고 실제 고통에는 무감각한 이들이 자랑삼는 그런 감상벽은 결코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 "Tears of compassion resemble those of Christ. But Christ never approved that sensibility of which many are proud, while they weep at mere tales of distress, but are hardened to real woe."[rh1]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 18세기 (대각성 운동)

휫필드는 나사로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정점으로 선포합니다. 공생애 후반부로 갈수록 이적이 점점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나타난다고 보며, 부흥설교 특유의 웅변으로 이 사건을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청중을 향한 직접적 선포로 다룹니다. >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가장 위대한, 아니 어쩌면 가장 위대한 이적처럼 보입니다." — "To an eye of sense, it seems to be one of the greatest, if not the very greatest miracle."[rh2]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 19세기

스펄전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11:26)는 질문을 마르다 한 사람이 아니라 회중 각자를 향한 질문으로 전환합니다. 이 본문의 위로는 막연한 일반론이 아니라 각 사람의 구체적 슬픔에 정확히 들어맞도록 예비된 것이며, 신앙의 핵심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 앞에 스스로 답하는 인격적 결단입니다. > "성도가 슬픔에 잠길 때,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꼭 맞는 위로가 이미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물쇠에는, 그분이 이미 준비하신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 "When Believers are sorrowful, they may be assured that a consolation is provided exactly adapted to their cases. For every lock that God has made, He has provided a key."[rh3]

수용사 흐름

청교도 헨리, 대각성 운동의 휫필드, 빅토리아 시대의 스펄전으로 이어지는 궤적은 같은 본문이 시대마다 다른 목회적 필요를 향해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헨리는 그리스도의 눈물에서 참된 신앙적 감정의 기준을 찾았고, 휫필드는 나사로 사건을 회심을 촉구하는 부흥의 선포로 삼았으며, 스펄전은 그것을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벼려냈습니다. 초점은 감정의 진정성(헨리) → 회심의 촉구(휫필드) → 개인적 결단(스펄전)으로 점차 좁혀지지만, 세 사람 모두 나사로의 부활을 지금 이 자리의 청중에게 직접 말을 거는 사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닙니다.

참고 자료

  1.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St. John*, Homily LXII-LXIV (요11:1-2, 30-31, 41-42), NPNF¹ vol. 14.
  2. John Cassian, in Schaff (ed.),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2, Vol. 11 (Sulpitius Severus, Vincent of Lerins, John Cassian).
  3.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Concise), 요한복음 11:33 주석.
  4. George Whitefield, *Works*, Vol. 6 — Sermons and Tracts, "The Resurrection of Lazarus."
  5. Charles Spurgeon, "The Believer Catechized" (No. 1568), *Spurgeon's Sermons* Vol. 26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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