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7절, 75절, 160절 설교 준비 자료 — 역사적 배경, 절별 주석, 강해설교
성경 본문
시편 119편 7절, 75절, 160절
역사적·문화적 배경 · 절별 주석 · 설교사 수용사
시편 119편 7절, 75절, 160절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시편은 앞서 살펴본 11편과 마찬가지로 저작 시기·저자를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표제가 있는 시들도 표제 자체가 후대 편집 과정에서 예전적·신학적 목적으로 붙여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119편은 이 점에서 오히려 단순합니다 — 어떤 인물의 이름도 붙어 있지 않은 무표제 시이기 때문입니다. 저작 연대를 특정 왕이나 사건과 연결 짓기보다, 이 시가 어떤 신앙 운동의 산물인지를 살피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 유익합니다.
토라 경건과 포로기 이후의 신앙 풍토
119편은 176절 전체가 오직 하나님의 토라(가르침·법·말씀·법도·계명·율례·규례·증거 등 여덟 개 남짓한 동의어로 반복 표현됨)를 향한 사랑만을 노래하는 이례적인 시입니다. 이런 집중은 성전이 무너지고 왕정이 끝난 뒤,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이 국가 제의에서 토라 중심의 신앙 실천으로 옮겨 가던 포로기 이후의 신앙 풍토를 반영한다고 널리 이해됩니다. 국가와 성전이라는 눈에 보이는 중심을 상실한 공동체에게, 손에 쥐고 암송하고 묵상할 수 있는 '기록된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은 에스라·느헤미야가 전하는 회복 공동체의 모습과도 통합니다 — 백성이 광장에 모여 토라 책을 낭독시키고 그 뜻을 새기는 장면은, 119편이 노래하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이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한 시대 신앙 운동의 결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알파벳 아크로스틱이라는 교육적 문학 장치
119편의 스물두 스탠자 구조(§15 참조)는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교육적 의도를 지닌 장치로 이해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가는 아크로스틱은 낭송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를 놓치지 않고 암송하도록 돕는 기억술적 장치이며, 지혜문학 전통(잠언·애가 등에도 나타나는 기법)에서 흔히 쓰였습니다. 시인은 이 정교한 틀 안에 자신의 신앙 여정 — 찬양의 다짐(7절)에서 실제 고난의 체험(75절)을 거쳐 말씀의 영원성에 대한 확신(160절)에 이르는 흐름 — 을 촘촘히 엮어 넣었습니다. 이는 즉흥적 토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암송하며 대를 이어 전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신앙 교본에 가깝습니다.
고대 근동의 '판단'(מִשְׁפָּט) 개념과 법 문화
본문 세 절을 관통하는 מִשְׁפָּט(판단·법도)이라는 단어는 고대 근동 세계 전반에서 통용되던 법 문화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 세운 '공의로운 재판관'으로 자처하며 법전을 반포했고, 그 법은 단순한 금지 규정의 나열이 아니라 신적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하는 통치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독특함은 이 מִשְׁפָּט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직접 나온다고 고백한 데 있습니다 — 시인은 사람이 만든 법정의 판결이 아니라 "주의 판단"(מִשְׁפָּטֶיךָ)을 배우겠다고 다짐하며, 법과 정의의 궁극적 근원을 인간 통치자가 아닌 하나님께 둡니다. 규율과 명령 체계 속에서 복무하는 이들에게, 법이 자의적 통제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질서의 표현일 수 있다는 이 시의 전제는 낯설지 않은 감각일 것입니다 — 다만 119편은 그 질서의 최종 근거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둔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언약과 종주-봉신 조약의 언어
מִשְׁפָּט·חֹק·מִצְוָה(계명)·עֵדוּת(증거) 같은 용어들이 시편 119편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배경에는, 고대 근동에서 통용되던 종주-봉신 조약의 문학적 틀이 자리하고 있다고 널리 이해됩니다. 고대 근동의 조약 문서는 종주가 봉신에게 베푼 은혜를 앞세운 뒤, 봉신이 지켜야 할 구체적 규정('증거'·'율례'에 해당하는 조약 조항)을 나열하고, 그 준수 여부에 따른 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정형화된 구조를 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익숙한 조약 언어를 빌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표현했으며, 119편이 즐겨 쓰는 '증거'(עֵדוּת, 조약 문서를 가리키는 데도 쓰이는 단어)라는 표현은 이 언약적 배경을 뚜렷이 반영합니다. 시인에게 토라를 지킨다는 것은 임의의 종교적 규율 준수가 아니라, 은혜로 먼저 자신을 구원하신 언약의 주께 대한 신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신명기가 "이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깝다"는 논리로 토라 준수를 값싼 순종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같은 신학적 결이 119편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낭송과 암송의 신앙 실천
토라를 향한 사랑이 이처럼 언어로 표현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의 습관으로 체화되었다는 사실도 이 시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제2성전기 유대 신앙에서 토라는 낭송·암송·되새김의 대상이었고, 신명기의 명령을 따라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집 문설주에 기록하는 관습(테필린·메주자)이 이 시기에 이미 자리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119편 곳곳에 등장하는 "주야로 묵상한다", "마음에 두었다", "입술로 선포한다" 같은 표현들은 이런 신체화된 신앙 실천의 언어이며, 토라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하루의 리듬 속에 각인된 삶의 규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침저녁으로 반복되는 훈련·점호·규정 준수의 리듬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반복적 말씀 암송의 경건은 낯선 종교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익숙한 삶의 문법에 가깝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지혜 전통과 토라의 결합
119편은 또한 지혜문학과 토라 경건이 하나로 수렴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잠언이 '지혜'를 삶의 근본 원리로 예찬하듯, 119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이 자신을 원수보다 더 지혜롭게 만들어 준다고 고백합니다(119:98). 이는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이 점차 토라 중심 신앙과 결합해 가던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본문으로 꼽히며, 이후 집회서(벤 시라)와 같은 후대 지혜 문헌에서 지혜와 토라를 사실상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집니다. 즉 119편은 이스라엘 신앙사에서 '지혜'와 '율법'이 서로 다른 두 범주가 아니라 하나로 합류해 가는 지점에 서 있는 본문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혜문학이 오랫동안 씨름해 온 신정론적 물음 —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 이 119편에서는 토라 신앙의 언어로 재진술됩니다. 욥기가 고난의 이유를 끝내 온전히 밝히지 않은 채 하나님의 위엄 앞에 머무는 결말로 나아간다면, 119편의 시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실하심(אֱמוּנָה)입니다. 지혜문학의 신정론적 질문에 토라 신앙이 내놓은 하나의 응답이 바로 75절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훈육의 사회적 맥락
75절이 고백하는 고난(עִנִּיתָנִי, '주께서 나를 낮추셨다')의 구체적 정체를 이 시 자체는 자세히 밝히지 않지만, 119편 전체에 흩어진 표현들 — 고관들의 비방(23절)·악인의 올무(61절, 110절)·핍박자들의 조롱(51절, 69절) — 을 종합하면, 시인이 겪은 고난은 개인의 질병이나 자연재해라기보다 사회적·정치적 압박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군·경 조직 안에서 규정과 상급자의 권위 아래 놓인 이들이 종종 겪는 부당한 지시나 조직 내 압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종류의 시련입니다. 시인이 그런 압박 한복판에서도 그 압박 자체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재해석해 낸다는 사실은, 고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상(사람)과 고난을 훈육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체(하나님)를 구별하는 신학적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유사한 조직 문화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이들에게도 유효한 해석의 틀을 제공합니다.
시편 119편 7절, 75절, 160절 각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본 섹션은 PD 주석서의 방법론, 원어 용례 데이터를 종합하여 각 절의 의미를 다면적으로 밝히는 상세 주해입니다.
119:7 — 정직한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의 다짐
본문: אוֹדְךָ בְּיֹשֶׁר לֵבָב בְּלָמְדִי מִשְׁפְּטֵי צִדְקֶךָ 직역: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울 때에.
원어·문법 핵심: - יֹשֶׁר(요셰르, '곧음·정직함'): 남성 단수 연계형으로 לֵבָב(마음)을 수식하여 '정직한 마음'이라는 관용구를 이룹니다. 구약 전체 14회로 비교적 드문 단어이며, 그 중 잠언에 5회·욥기에 3회가 집중됩니다(신 9:5·왕상 9:4·대상 29:17·욥 6:25 등에서도 확인됩니다). 지혜문학에 집중된 이 단어를 119편이 첫머리에서 채택했다는 사실은, 이 시가 처음부터 지혜문학의 윤리적 언어로 신앙을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 מִשְׁפְּטֵי צִדְקֶךָ('주의 의로운 판단들'): מִשְׁפָּט(판단·법도)과 צֶדֶק(의로움)이 연계형으로 결합한 표현입니다. מִשְׁפָּט은 구약 전체 421회, 그 중 시편에만 65회로 집중되는 매우 빈번한 단어이며, 이 절의 용법은 뒤이은 75절·160절에서도 동일 어근이 반복되어(§1 참조) 세 절을 잇는 핵심 실입니다. - LXX 대역: 이 절을 헬라어 역본은 ἐξομολογέω σοί κύριος ἐν εὐθύτης καρδία ἐν ὁ μανθάνω μέ ὁ κρίμα ὁ δικαιοσύνη σοῦ('내가 주께 정직한 마음으로 고백하리니,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로 옮겨, 히브리어 어순과 어휘 구조를 상당히 충실히 따라갑니다.
주석적 논의: 이 절은 미완료 동사 אוֹדְךָ(찬양하겠습니다)로 시작하여,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다짐을 앞세웁니다. 그런데 이 다짐은 조건 없는 감정 토로가 아니라 בְּלָמְדִי('내가 배울 때에')라는 부정사 연계형 구문에 매입니다 — 즉 찬양은 배움이라는 구체적 행위와 시간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배움의 대상은 추상적 교훈이 아니라 מִשְׁפְּטֵי צִדְקֶךָ,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들입니다. 이는 시인에게 신앙이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배워야 할 구체적 내용을 가진 지식 체계임을 전제하는 진술입니다. 동시에 그 배움에 임하는 태도는 בְּיֹשֶׁר לֵבָב, 곧 정직한 마음이어야 함이 강조됩니다 — 마음의 곧음 없이 이루어지는 학습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절이 시 전체의 도입부(알레프 스탠자)에 놓인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시인은 176절에 걸친 긴 명상을 시작하며 먼저 자신의 내적 태도(정직함)와 배움의 목표(하나님의 의로운 판단)를 함께 선언하는데, 이는 이후 전개될 모든 고백 — 기쁨이든 고난이든 — 이 이 정직한 배움의 자세 위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합니다.
해석적 쟁점: - 스탠자 내 절 순서: 일부 비평적 연구는 알레프 스탠자 안에서 절의 순서가 필사 과정 중 부분적으로 뒤바뀌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7절이 본래 2절 앞에 놓여 더 정교한 대구를 이루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소개합니다(브릭스(Briggs)·그레이스 브릭스(Grace Brigg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1, ICC, 1907, p.145). 다만 이는 본문비평상의 가설적 논의일 뿐, 오늘 전해지는 본문의 논리적 흐름(찬양의 다짐 → 배움의 결단)을 읽어 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설교적 함의: 이 절의 주해가 도달하는 요지는, 참된 찬양이 배움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훈련과 교육이 일상인 군·경 현장의 청년들에게, 매뉴얼과 규정을 익히는 과정이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정직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 인격적 훈련이라는 사실은 낯설지 않은 경험일 것입니다. 오늘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태도부터 정직해야 진짜 찬양이 시작됩니다"라는 명제로 이 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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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5 — 고난을 성실하심으로 재해석하는 확신
본문: יָדַעְתִּי יְהוָה כִּי צֶדֶק מִשְׁפָּטֶיךָ וֶאֱמוּנָה עִנִּיתָנִי 직역: 여호와여, 내가 압니다, 주의 판단들이 의로우시며 주께서 성실하심으로 나를 낮추셨음을.
원어·문법 핵심: - עָנָה(아나, 여기서는 피엘 완료 עִנִּיתָנִי): 칼형은 '낮아지다·겸손하다'는 상태를, 피엘형(강의)은 그 상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사역적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입니다(창 15:13·창 16:6·창 16:9 등 피엘형 용례가 폭넓게 확인됩니다). 즉 이 동사형은 고난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신 결과임을 문법적으로 드러냅니다. - אֱמוּנָה(에무나, '견고함·신실함'): 구약 전체 49회, 그 중 시편에만 22회가 집중됩니다(출 17:12·신 32:4·삼상 26:23 등에서도 하나님 또는 사람의 신뢰성을 가리키는 용례로 나타납니다). 이 단어가 עִנִּיתָנִי('나를 낮추셨다')와 한 문장에 결합된다는 사실이 이 절의 신학적 핵심입니다 — 괴롭게 하신 행위 자체가 신실하심의 증거로 재해석됩니다. - LXX 대역: 헬라어 역본은 이 절을 γινώσκω κύριος ὅτι δικαιοσύνη ὁ κρίμα σοῦ καί ἀλήθεια ταπεινόω μέ('여호와여, 내가 압니다, 주의 판단이 의로우시며 진실하심으로 나를 낮추셨음을')로 옮겨, 히브리어 אֱמוּנָה를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진실·참됨')로 번역합니다 — 160절의 אֱמֶת와 같은 그리스어 단어로 수렴되는 지점입니다(§1-③ 참조).
주석적 논의: 이 절은 완료형 יָדַעְתִּי('내가 압니다')로 시작합니다. 완료형은 이 인식이 방금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결론임을 보여 주며, 시인은 이 확신을 고난의 한복판에서 선언합니다. 절의 구조를 살피면 두 개의 명사문이 접속사 כִּי로 이어져 있습니다 — "주의 판단들이 의로우시다"(צֶדֶק מִשְׁפָּטֶיךָ)와 "성실하심으로 나를 낮추셨다"(וֶאֱמוּנָה עִנִּיתָנִי). 이 두 명제는 병렬 관계이면서도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기 때문에, 그 판단이 낳은 고난 역시 신실하심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왜 자신이 고난을 당했는지 설명하는 대신, 그 고난을 보내신 분의 '성품'(אֱמוּנָה)에 근거해 고난 자체를 신뢰하는 길을 택합니다. 이는 고난의 이유를 캐묻는 신정론적 접근과는 다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신앙적 접근입니다. 아울러 עִנִּיתָנִי의 1인칭 목적격 접미어는 이 낮추심이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 몸으로 겪은 구체적 체험임을 분명히 합니다.
설교적 함의: 이 절의 주해가 도달하는 요지는, 신앙의 성숙이 고난의 이유를 다 아는 데 있지 않고 고난을 보내신 분의 성품을 신뢰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상급자의 지시나 조직의 규율이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 그 배후의 질서를 신뢰해야 하는 군·경 조직 문화 속 청년들에게, 이 절은 낯설지 않은 논리 구조를 제공합니다. "이유를 다 알아야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대상의 신실하심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명제로 강단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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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60 — 말씀 전체를 향한 총괄적 확언
본문: רֹאשׁ דְּבָרְךָ אֱמֶת וּלְעוֹלָם כָּל מִשְׁפַּט צִדְקֶךָ 직역: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며, 주의 의로운 판단은 모두 영원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시편 119편 7절, 75절, 160절은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나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는지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 본 섹션은 17세기 청교도부터 19세기 강단에 이르기까지, 이 시편이 교회사에서 어떻게 읽히고 설교되어 왔는지 연대순으로 제시합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 17-18세기 (청교도)
매튜 헨리는 시편 119편 전체를 "믿는 자의 경험을 진술한 시"로 규정하며, 그 경험이 성령의 감화와 얼마나 일치하는가로 신앙의 진정성을 가늠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시인이 실제로 고난을 겪었다고 고백하는 대목(73-80절, 요드 스탠자)에 이르러 헨리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뿐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다는 사실을 "자기 일이 되기 전까지는 인정하기 쉽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며, 정작 자신이 그 판단의 대상이 될 때에도 그 의로우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시험대라고 봅니다. 이는 75절이 고백하는 바로 그 지점 —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시며 그 낮추심이 성실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정하는 것 — 을 목회적 언어로 풀어낸 것입니다.
> "그 고난 아래 있는 모든 지탱함은 긍휼과 자비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부드러운 자비이니, 아버지의 긍휼이요 어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갖는 애틋함입니다." — "All supports under affliction must come from mercy and compassion. The mercies of God are tender mercies; the mercies of a father, the compassion of a mother to her son."[rh1]
존 웨슬리(John Wesley) / 18세기
존 웨슬리는 시편 119편을 여는 자리에서, 이 시가 이토록 길고 그 내용이 지극히 중대했기에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스물두 부분으로 나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구조가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지루함을 막고 기억에 새기려는" 목회적·교육적 의도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웨슬리의 이 언급은 §15가 다룬 아크로스틱의 교육적 기능을 18세기 강단이 이미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 7절의 다짐에서 시작해 160절의 총괄 확언으로 마무리되는 흐름이 우연한 배열이 아니라, 낭송자가 순서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암송하도록 설계된 신앙 교본이라는 이해입니다.
> "이 시편은 매우 길고 그 내용이 지극히 중요했기에, 시인은 히브리어 문자의 수를 따라 스물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루함을 막고 이를 기억에 새기고자 했습니다." — "Because this psalm was very large, and the matter of it of the greatest importance, the psalmist thought fit to divide it into two and twenty several part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Hebrew letters, that he might both prevent tediousness, and fix it in the memory."[rh2]
알렉산더 맥라렌(Alexander MacLaren) /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스코틀랜드의 설교가 알렉산더 맥라렌은 119편 전체를 "다양성 속의 단조로움"이라는 역설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시가 가장 길면서도 가장 단순한 시라고 지적합니다 — 오직 하나의 생각(하나님의 법의 무한한 소중함)이 온갖 형태로 반복되고 변주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맥라렌은 이를 "하나의 현에서 그토록 풍성한 음악을 이끌어 내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에 비유하는데, 이 통찰은 본 자료집이 다루는 세 절(7·75·160절)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유효합니다 — 세 절은 서로 다른 절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판단은 의롭고 신실하며 영원하다'는 하나의 선율을 각기 다른 자리에서 되울리고 있을 뿐입니다.
> "이 시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있으며, 그것이 온갖 형태로 두들겨 펴지고 온갖 다양한 고려 위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단 하나의 현에서 그토록 풍성한 음악과 선율을 이끌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 "There is but one thought in it, beaten out into all manner of forms and based upon all various considerations... It reminds one of the great violinist who out of one string managed to bring such music and melody."[rh3]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 19세기
찰스 스펄전은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강단에서 119편을 여러 차례 반복해 설교했는데, 그 중 두 편이 본 자료집이 다루는 절들과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7절 바로 앞 절(6절)을 본문으로 삼은 "맑은 양심"이라는 설교에서, 스펄전은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가 반드시 실패로 끝난다고 못박으면서도, 이미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주의 모든 계명을 존중하는" 삶을 사는 것은 복음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구별합니다 — 이는 7절이 찬양의 다짐 직후에 배움의 결단(מִשְׁפְּטֵי צִדְקֶךָ)을 놓는 순서와 정확히 같은 신학적 논리입니다. 또한 71절("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을 다룬 "두 가지 좋은 것"이라는 설교에서는, 40세 즈음 인생의 연륜이 가르쳐 주는 지혜에 빗대어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배우게 하는 유익한 스승이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75절이 고난을 성실하심의 증거로 재해석하는 논리와 같은 결의 확신입니다.
>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6절 본문) — "Any attempt to keep the Law of God with the view of being saved thereby is sure to end in failure."[rh4]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1절 본문) — "It is good for me that I have been afflicted; that I might learn Your statutes."[rh5]
수용사 흐름
참고 자료
-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vol. 3 (Job to Song of Solomon), on Psalm 119:73–80.
- 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Whole Bible*, on Psalm 119 (introductory note).
- Alexander MacLaren, *Expositions of Holy Scripture: The Psalms*, on Psalm 119.
- Charles H. Spurgeon, *Spurgeon's Sermons*, vol. 24 (1878), No. 1443, "A Clear Conscience," on Psalm 119:6.
- Charles H. Spurgeon, *Spurgeon's Sermons*, vol. 27 (1881), No. 1629, "Two Good Things," on Psalm 1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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