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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22장 설교 준비 자료 — 역사적 배경, 절별 주석, 강해설교

성경 본문

민수기22장

역사적·문화적 배경 · 절별 주석 · 설교사 수용사

민수기22장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역사적 상황 — 두려움으로 바뀐 관계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기 직전까지, 두 민족의 관계는 사실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 땅을 우회해 지나가면서 그들에게서 빵과 물을 값을 치르고 사기까지 했을 정도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bg1] 그런데 22장이 열리는 시점에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습니다 —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라는, 당시 요단 동편의 실세 세력을 잇달아 무너뜨린 것을 모압 왕 발락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bg2] 모압은 자신들이 손대지 않았음에도 이웃 나라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닥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본문이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니…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근심하였다"고 두 동사를 겹쳐 쓴 것은 이 공포가 단순한 걱정을 넘어 생리적 수준의 두려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목할 점은 발락이 이 위기 앞에서 즉각 미디안의 장로들과 연합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모압이 미디안 장로들에게 말했다"고 언급하며, 뒤이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함께 발람에게 갔다고 전합니다.[bg3] 모압과 미디안은 본래 별개의 정치체였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의 위협 앞에서 임시 동맹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이 장은 단순한 개인 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 정치적 위기 대응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미디안은 모압보다 남쪽, 아라바 방면에 자리한 별도의 부족 연합체로 알려져 있으며,[arch2] 두 나라가 평소 뚜렷이 구분되는 정치체였음에도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의 위협 앞에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스라엘의 군사적 부상이 요단 동편 전역에 준 충격이 컸음을 보여줍니다. 이 임시 동맹은 22장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25장의 바알브올 사건과 31장의 미디안 전쟁에서도 모압·미디안이 나란히 이스라엘과 얽히는 서사적 복선이 됩니다 — 즉 22장의 국제 정치적 위기 대응은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민수기 후반부 전체를 관통하는 갈등 축의 출발점입니다.

발락이 자국이나 인접국이 아니라 훨씬 먼 브돌까지 사신을 보내면서까지 발람을 청했다는 사실도 이 시대의 국제적 예언자 관습을 보여줍니다. 저명한 예언자·복술가는 한 나라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여러 왕실이 공유하는 자원처럼 여겨졌고, 그의 말 한마디가 곧 국가의 존망을 좌우한다고 믿어졌기에 발락은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를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본문이 발락의 사신들을 두 차례(1차 22:5-7, 2차 22:15-17)에 걸쳐 보내고, 두 번째는 "더 많고 존귀한 고관들"을 딸려 보내는 것으로 격을 높이는 것도, 발람을 확보하는 일이 발락에게 있어 국가적 우선순위였음을 시사합니다.

지리적 배경 — 모압 평지와 아르논

본문의 무대인 "모압 평지"는 요단강 동편, 여리고 맞은편의 저지대로, 이전에는 모압 영토였다가 아모리인들에게 넘어간 뒤 이스라엘이 시혼을 격파하며 다시 확보한 지역입니다.[bg2] 이 지역은 벧여시못에서 아벨싯딤에 이르는 넓은 진영지로 알려져 있으며,[bg2] 발락이 다스리던 모압 본토의 경계는 아르논 강이었습니다. 아르논은 사해로 흘러드는 계곡으로, 모압과 아모리(이스라엘이 새로 확보한 영토) 사이의 자연 경계 역할을 했습니다.[arch1] 이스라엘이 이 경계 바로 너머, 곧 모압이 자신의 완충지대로 여겼을 법한 지역에 진을 쳤다는 사실 자체가 발락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을 것입니다.

발람이 있던 "브돌"은 "강가에" 있는 곳으로 언급되는데(22:5), 이는 유프라테스강 유역, 곧 메소포타미아 방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랫동안 이해되어 왔습니다 — 발락이 자기 인접 지역이 아니라 훨씬 먼 곳까지 사람을 보내 예언자를 청했다는 점은, 발람의 명성이 그만큼 국제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발람과 고대 근동의 예언자 관습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복술의 예물을 손에 들고" 발람을가 찾아간 것은(22:7), 고대 근동에서 저명한 예언자·점술가에게 자문을 구할 때 사례금이나 예물을 지참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발람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대로" 대답하겠다고 답한 것은(22:8) — 이 인물이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그 신탁을 구하는 방식에 익숙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고대 근동의 왕실 문헌에서도 통치자가 군사·정치적 위기 앞에서 신적 권능에 호소하고 그 승패를 신의 개입으로 돌리는 관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앗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의 왕실 비문은 전쟁의 여신 이슈타르가 왕의 편에 서서 적의 활을 꺾고 전열을 무너뜨렸다고 선포하며, 승리를 철저히 신의 직접적 개입으로 서술합니다.[ane1] 발락이 군사력 대신 저주라는 초자연적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막으려 한 것도 이러한 고대 근동의 공통된 사고방식 —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힘이 궁극적으로는 신적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 —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이 구도를 뒤집어, 발락이 동원한 그 초자연적 수단마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서사를 이끌어 갑니다.

참고 자료

  1. 참조: 신명기 2:28-29(모압·에돔과의 이전 우호적 통행 관계에 관한 본문 내적 증언).
  2. John Gill, *John Gill'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on Num 22:1-2; Paul E. Kretzmann, *Kretzmann's Popular Commentary — Old Testament*, vol. 1, on Num 22:1.
  3. John Calvin (tr. C. W. Bingham), *Commentaries on the Four Last Books of Moses*, vol. 4, on Num 22:7.
  4. Talbert, Richard J. (ed.), *Barrington Atlas of the Greek and Roman World*, map 71 B3 "Arnon fl."; Abel, F.-M., *Géographie de la Palestine*, II (1933), 487-89.
  5. Talbert, Richard J. (ed.), *Barrington Atlas of the Greek and Roman World*, map 76 F4 "Madiane/Midian."
  6. Esarhaddon 001 (Royal Inscription, Neo-Assyrian, Kuyunjik/Nineveh), iv 77, iii 81 — RINAP 4 계열 왕실 비문 코퍼스.

민수기22장 각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41절에 이르는 본문 전체 중 신학적 무게와 설교 초점이 가장 큰 5개 단락은 5블록 구조(본문·직역·원어·문법 핵심·주석적 논의·설교적 함의)로 깊이 다루고, 나머지는 의미 단위로 묶어 흐름요약으로 짚습니다.

22:1 — 모압 평지에 이르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친 것은(1절), 21장의 군사적 승리(시혼·옥 격파)가 곧바로 22장의 위기로 전환되는 지리적 경첩입니다(§15 「본문의 위치와 구조」 참조). 별도의 전투 없이 지명 하나로 다음 장면을 여는 간결한 서술은, 이스라엘의 진군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모압의 반응에 초점을 두려는 저자의 의도적 배치입니다.

22:2-4 — 발락의 공포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다는 것과(2절),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고 근심하였다"는 두 동사의 중첩은(3-4절) 이미 §2에서 다룬 바와 같이 생리적 수준의 공포를 그립니다. 여기서 덧붙일 원어 지점은, 발락이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스라엘을 "들의 소가 밭의 풀을 핥음 같이" 자신들을 "핥아버릴" 것이라 묘사한 표현(4절, 라하크)입니다 — 초식동물이 풀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그림으로 절멸의 공포를 형상화한 것으로, 훗날 22장 5-6절에서 발람에게 저주를 청탁하는 논리적 근거가 됩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왕실 비문에서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적대적 문맥에 등장한 전례가 있습니다 — 이집트 메르넵타 석비(주전 13세기 말)는 "이스라엘은 황폐해져 그 씨가 없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에 이르기 전부터도 주변 열강의 공식 기록에 정복 대상으로 등재될 만큼 존재감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발락의 공포가 근거 없는 과장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합니다.

설교적 함의: 발락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망상이 아니라 실제 힘의 불균형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옵니다. 회중도 상황 판단 자체가 틀렸다기보다, 그 두려움을 하나님이 아닌 저주·계략으로 해결하려 한 방향이 틀렸다는 것을 이 장면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 위협 앞에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22:5-6 — 발람 초빙과 저주 청탁

발락이 브돌의 발람에게 사신을 보내 "이 백성을 저주하라"고 청탁하며 "카바브"(קָבַב, §3에서 다룬 이 이야기 전용 저주-어휘) 동사를 쓰는 대목입니다(6절). "내가 아는 일이라 네가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발락의 말은, 이방 왕조차 발람의 말에 실효적 힘이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창세기 12장 3절의 언약 문구를 낯선 입술로 되울리는 아이러니를 이룹니다.

22:7-8 — 장로들의 도착과 하룻밤 유숙

모압과 미디안 장로들이 "복술의 예물"을 손에 들고 도착하고(7절), 발람이 즉답을 미룬 채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대로 대답하리라"며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대목입니다(8절). 이 대답은 발람이 이미 여호와의 이름과 신탁 구도를 알고 있었음을 전제하며, 이후 8-38절 전체를 관통하는 발람의 자기규정 — 자신은 전달자일 뿐 결정자가 아니라는 것 — 이 여기서 처음 선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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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12 — 하나님의 첫 응답: 저주 요청의 거절

본문: וַיָּבֹא אֱלֹהִים אֶל־בִּלְעָם וַיֹּאמֶר מִי הָאֲנָשִׁים הָאֵלֶּה עִמָּךְ׃... לֹא תֵלֵךְ עִמָּהֶם לֹא תָאֹר אֶת־הָעָם כִּי בָרוּךְ הוּא׃ 직역: 하나님이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길,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시니...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는 복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원어·문법 핵심: - מִי הָאֲנָשִׁים הָאֵלֶּה עִמָּךְ("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나님의 질문형 접근은 정보 결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발람 스스로 상황을 진술하게 하여 그의 의중과 태도를 드러내는 구약 전형적 심문 화법입니다(창세기 3장 9절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4장 9절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와 동일한 수사적 패턴). - בָּרוּךְ הוּא("그는 복 받은 자다"): 카알 수동분사로, 이미 완료되어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 이스라엘의 복은 지금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는 것을 문법 형태 자체가 전제합니다. - LXX 용례: 칠십인역(LXX)은 9절의 "이 사람들이 누구냐"를 복수 실사 대신 단수 지시어 τίς ὁ ἄνθρωπος οὗτος παρά σοί("이 사람이 누구냐")로 단순화해 옮기며, 12절의 "복 받은 자"는 εὐλογέω 동사형으로 대역해 히브리어 수동분사가 담은 "이미 확정된 상태"라는 함의를 그대로 보존합니다.

주석적 논의: 하나님이 발람에게 찾아오신 방식(꿈으로 이해되어 온 야간 계시, 8절의 유숙 언급과 연결)과 질문으로 시작하는 대화 구조는, 이방 예언자에게도 참 계시가 임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계시가 항상 심문의 형태 — 곧 발람의 동기를 시험하는 형태 — 를 띤다는 것을 함께 보여줍니다. 발람의 대답(10-11절)은 발락의 요청을 축어적으로 옮기되 "복 받은 자"라는 표현은 빠뜨리지 않고, 거절의 근거로 정확히 그 지점("그는 복 받은 자이기 때문에")을 못박습니다. 이는 발람이 몰라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알고도 다시 청탁을 받아들이는 인물임을 예비하는 서술적 복선입니다.

해석적 쟁점: 전지하신 하나님이 "누구냐" 묻는 것을 문자적 무지로 읽어야 하는가 — 대다수 해석은 이를 인간과의 대화를 인격적 형식으로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자기낮추심(accommodatio)으로 읽으며, 본 자료집도 그 독법을 따릅니다.

설교적 함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복 받은 자"라는 신분은 상황이나 외부의 판단으로 흔들리지 않는 완료된 사실입니다. 오늘의 회중도 자신의 정체성을 형편의 부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선언하신 자리에서 찾아야 하며, 설교자는 이 구절로 "네 신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 오늘 흔들리는 것은 그 신분에 대한 인식이지 신분 자체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전할 수 있습니다.

22:13-17 — 거절 통보와 두 번째 사신단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여호와께서 나를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 통보하자(13절) 발락은 물러서지 않고 "더 많고 존귀한 고관들"을 두 번째로 보내며(14-15절)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라"는 파격적 조건을 제시합니다(17절). 첫 거절이 두 번째 청탁의 격을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끌어올린다는 사실은, 인간적 계략이 신적 거절 앞에서 취하는 전형적 패턴 — 물러서지 않고 조건을 가중시키는 것 — 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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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8-20 — 발람의 선언과 조건부 허락

본문: לֹא אוּכַל לַעֲבֹר אֶת־פִּי יְהוָה אֱלֹהָי לַעֲשׂוֹת קְטַנָּה אוֹ גְדוֹלָה׃... קוּם לֵךְ אִתָּם וְאַךְ אֶת־הַדָּבָר אֲשֶׁר־אֲדַבֵּר אֵלֶיךָ אֹתוֹ תַעֲשֶׂה׃ 직역: 내가 여호와 내 하나님의 입을 넘어가서는 작은 일도 큰 일도 행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라, 다만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너는 행하라.

원어·문법 핵심: - לֹא אוּכַל לַעֲבֹר אֶת־פִּי("나는 입을 넘어갈 수 없다"): "말씀을 넘어가다/거스르다"라는 관용구로, 발람이 자신을 여호와의 말씀에 매인 전달자로 규정하는 자기 선언입니다 — 이 원리 선언은 38절에서 문자 그대로 다시 반복되어 22장 전체를 감싸는 수미상관을 이룹니다. - וְאַךְ אֶת־הַדָּבָר("다만 그 말만"): 제한 불변화사 아크(אַךְ)가 허락의 폭을 극도로 좁혀, "가라"는 명령이 자유재량의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한 통제 아래 놓이는 허락임을 문법적으로 못박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민수기22장은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나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는지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 본 섹션은 초기 교회 교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본문이 교회사에서 어떻게 설교·해석되어 왔는지 연대순으로 제시합니다.

5.1 교부 해석 전통 (Patristic Interpretation)

> 본 섹션은 초기 교회(1-4세기) 교부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읽고 해석했는지, ANF·NPNF 문헌을 바탕으로 제시합니다.

유스티누스 순교자(Justin Martyr) / 2세기 (변증가 시대)

유스티누스는 발람 내러티브를 그리스도 예표론의 틀로 읽습니다. 성령이 발람에게 미리 경고하신 것은, 그가 무지한 채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도록 조상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미리 보이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발람이 탄 나귀를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는 존재로 해석합니다 — 지친 사람들이 그 몸에 실려 쉼을 얻듯, 나귀는 구원자가 우리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심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유스티누스에게 발람의 저주 실패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저주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음을 예증하는 사건입니다.[pat1]

바실리우스(Basil of Caesarea) / 4세기 (니케아 시대)

바실리우스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논의에서 발람을 반면교사로 세웁니다. 그는 스가랴와 이사야를 인용해 거짓 꿈과 점술이 결국 헛됨을 지적한 뒤, 발람이 모압 왕의 막대한 뇌물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말을 감히 내뱉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참된 예언의 표지는 스스로 예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지 여부에 있다는 것이 바실리우스의 요지입니다.[pat2]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n) / 4세기 (니케아 시대)

암브로시우스는 발람 사건을 재물욕의 오래된 사례로 다룹니다. 그는 아간의 탐심 사건과 나란히 놓으며, 발락이 발람을 뇌물로 매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던 시도 역시 하나님이 저주를 막으셨기에 무산되었을 뿐, 재물에 대한 사랑 자체는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위협하는 오래된 악덕이라고 경고합니다. 율법이 애초에 이 악덕을 억제하려고 주어졌다는 지적도 함께 덧붙입니다.[pat3]

해석의 흐름 — 초기 교회 전통의 형성

교부들의 발람 읽기는 2세기에서 4세기로 가며 뚜렷이 이동합니다. 유스티누스에게 발람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였습니다 — 말 못하는 나귀가 그리스도의 몸을, 강요된 침묵이 결코 성취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니케아 시대의 바실리우스·암브로시우스에 이르면 초점은 예표에서 목회적·윤리적 교훈으로 옮겨갑니다 — 참·거짓 예언 구별, 재물욕 경계라는 각자의 목회적 필요가 발람을 소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 교부 모두의 확신은 같습니다 — 발람이 아무리 뛰어난 지식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말은 결코 그 입에서 나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사·수용사 (16-19세기)

매튜 헨리(Matthew Henry) / 17세기 (청교도 시대)

헨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은 섭리로 항상 죄를 막지는 않으시지만, 그 죄를 승인하시는 것도 결코 아니다"라는 원리로 읽습니다. 나귀 사건에서는 "이 천사는 발람의 대적자였습니다 — 발람이 그를 대적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죄악의 길에서 멈추게 하는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우리의 가장 좋은 벗입니다"라고 적용합니다.[rh1] 두 번째 사신 앞에서 흔들리는 대목은 "죄 짓도록 허락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 부패의 확실한 증거"라 지적하고,[rh2] 발락과의 대면에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했다고 자처한 것만큼이나, 실은 늘 발락을 기쁘게 하고 싶어했다"고 발람의 이중성을 요약합니다.[rh3]

존 웨슬리(John Wesley) / 18세기

웨슬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주해」에서 짧고 정밀한 문법·역사적 각주를 남깁니다. "모압 평지"가 원래 모압 땅이었다가 시혼에게, 다시 이스라엘에게 넘어간 지역임을 짚고, 모압과 미디안이 "본래 나뉜 왕국이었으나 공동의 적 앞에서 연합했다"고 설명합니다. 발람은 베드로후서 2장 16절을 근거로 "하나님이 감동시켜 예언들을 말하게 하신" 존재라 못박으면서도, 훗날 드러난 그의 탐욕을 함께 지적합니다.[rh4]

알렉산더 매클라렌(Alexander MacLaren) / 19세기

매클라렌은 설교 "발람"에서 이 인물을 "악한 사람 안에도 얼마나 많은 지식과 선을 향한 애착이 있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합니다. "완전히 악한 사람은 악마일 뿐, 언제나 뒤섞임이 있다"며, "사람을 만드는 것은 이따금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향하는 방향"이라고 역설합니다.[rh5] 저주를 내뱉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저주하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발람은 "옳은 일을 거부 않으면서도 그릇된 일을 원하는" 인간 내면의 보편적 혼재를 드러냅니다.

수용사 흐름

세 세기에 걸친 수용은 한 방향으로 수렴합니다 — 발람을 겉으로 드러난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실제 방향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교도 헨리는 "죄 지을 허락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의 부패"라고 단언했고, 웨슬리는 절제된 문법적 주해로도 발람의 예언자적 지위와 탐욕을 나란히 세워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19세기 매클라렌은 이를 다시 설교의 언어로 되돌려 청중 각자의 "지식과 죄의 뒤섞임"을 직접 겨냥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세 사람 모두의 질문은 같습니다 — 우리의 신앙고백이 삶 전체가 향하는 방향과 실제로 일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고 자료

  1.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in *Ante-Nicene Fathers*, Volume 01.
  2. Basil of Caesarea, *Letters and Select Works*,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2, Volume 08.
  3. Ambrose of Milan, *Select Works and Letters* (*De Officiis* 계열 논의),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2, Volume 10.
  4.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Concise)*, on Num 22:22-35.
  5.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Concise)*, on Num 22:15-21.
  6. Matthew Henry,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Concise)*, on Num 22:36-41.
  7. 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Whole Bible*, on Num 22:1-5.
  8. Alexander MacLaren, *Expositions of Holy Scripture*, sermon "Balaam" on Num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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