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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9 — 역사적 배경, 절별 주석, 설교사 수용사

성경 본문

마태복음 5:9

역사적·문화적 배경 · 절별 주석 · 설교사 수용사

마태복음 5:9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역사적 정황

마태복음 5:9이 속한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북서쪽의 산(ὄρος, '산', 마 5:1)에 오르사 제자들과 무리에게 선포하신 것으로 기록됩니다. 산이라는 설정은 마태의 편집 신학에서 신현(神顯, theophany)의 장소요, 새로운 모세 유형론의 장(場)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신 모세의 역할을 훨씬 능가하는 권위자로 제시되며, 팔복(마 5:3-12)은 그 새 언약의 선언으로 기능합니다.

산상수훈이 선포된 시기는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재위)가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리던 로마 속령 치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전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Augustus Caesar) 이래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강제적 평화 체계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역사』(Histories) 5권에서 유대 전쟁(기원후 66-73년)의 전조를 묘사하며,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과정과 유대 민족의 저항 의식을 기록합니다. 이 '칼에 의한 평화'(pax armata)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εἰρηνοποιός(에이레노포이오스, '화평케 하는 자')의 의미를 정면으로 재정의하는 문맥이 됩니다. 로마 세계에서 εἰρήνη(에이레네, 평화)는 군사적 정복과 질서 유지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으나, 예수는 그 평화 개념을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으로 역전시키십니다.

샬롬(שָׁלוֹם) 전통과 하나님의 자녀

팔복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히브리어 שָׁלוֹם(샬롬)의 풍부한 의미 범위는 결정적입니다. 헬라어 εἰρήνη(에이레네)가 LXX(칠십인역)에서 히브리어 שָׁלוֹם의 번역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두 단어는 의미론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샬롬은 단순한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인격의 온전함(wholeness), 공동체의 번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되는 포괄적 복락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예레미야 29:7은 바빌론 포로 중에서도 그 성의 샬롬을 구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으며, 이사야 9:6은 오실 메시아를 '평화의 왕'(שַׂר-שָׁלוֹם, 사르 샬롬)으로 호칭합니다.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평화는 메시아 시대의 표징이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 이루어질 종말론적 선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υἱοὶ θεοῦ)이라는 칭호 역시 구약의 언약 전통과 깊이 연관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집합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장자'(בְּכֹרִי, 출 4:22), 곧 언약 백성으로서 특별한 자녀 관계를 가리키는 어휘로 불렸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메시아 공동체의 구성원 됨이 새로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연결되며(롬 8:14-17), 마태복음은 예수 자신을 궁극적인 '하나님의 아들'(마 3:17; 17:5)로 제시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 아들 됨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묘사합니다. 즉 화평케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선언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화해 사역을 닮은 자들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적 맥락

예수의 청중은 농촌 갈릴리의 어부·농부·세리·종교 지도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 운동인 열심당(Zealots) 계열의 이들도 있었고, 협력과 순응을 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갈등과 분열의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지배 질서와 저항 세력 모두와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민 윤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크세노폰(Xenophon)의 『헬레니카』(Hellenica) 6.3.4는 스파르타 사절단이 평화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외교적 역할을 담당하는 장면을 묘사하며, 고전 헬라 세계에서 평화 중재자는 고도의 지위와 권위를 갖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께서 '화평케 하는 자들'을 복 있다 하신 것은, 그 칭호에 담긴 고귀하고 능동적인 의미를 십분 활용하되, 그 지위를 제국적 권력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언약적 관계에 기초하도록 재정의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 배경

안전한 고고학 데이터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제2성전은 헤롯 대왕(기원전 37년-기원전 4년) 치하에서 기원전 20년경부터 대규모 개축이 시작되어 기원후 63년경 완공되었으나 7년 후인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의 공동체와 예루살렘의 정치적·종교적 긴장은 갈릴리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갈릴리에도 존재했습니다(마 5:20). 예수께서 팔복에서 선언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이 제의·율법·정치의 복합적 긴장 구조 안에서 그 폭발적 의미를 발휘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Sitz im Leben

빌조엔(Viljoen)은 마태복음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1세기 후반 유대 기독교 공동체, 특히 회당과의 갈등을 경험하던 공동체로 분석하며, 토라 준수의 강조가 마태의 편집 의도에서 핵심임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팔복의 화평케 하는 자 선언은 단순히 개인 덕성의 목록이 아니라, 분열과 적대가 심화되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 인류가 살아 내야 할 소명의 선포입니다.

마태복음 5:9 각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본 섹션은 마태복음 5:9의 원어·문법 핵심과 주석적 논점을 본문 구조에 따라 두 절 단위로 나누어 심층 주해합니다. 각 단위는 본문 → 직역 → 원어·문법 핵심 → 주석적 논의 → 설교적 함의의 다섯 블록으로 구성됩니다. 개혁주의 시각(언약신학·하나님 주권·은혜론)을 명시적으로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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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a — μακάριοι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본문: μακάριοι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직역: "복 있도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여"

원어·문법 핵심:

μακάριοι(마카리오스, 복된)는 형용사 주격 복수 남성으로, 복을 '선언'하는 형식입니다. 헬라어에서 μακάριος는 본래 신들의 복락 상태나 죽은 자의 행복을 가리켰으나, 칠십인역(LXX)이 이 단어를 히브리어 אַשְׁרֵי(아쉬레)의 번역어로 사용하면서 의미가 전환됩니다. LXX에서 μακάριος는 73회 등장하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의 은총 상태를 가리킵니다. 팔복 형식에서 μακάριοι는 명령법이 아닌 선언법(indicative)입니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성취해야 복이 온다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품 안에 있는 자들의 현실을 선포하십니다.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에이레노포이오이, 화평케 하는 자들)는 정관사(οἱ)가 붙은 형용사 주격 복수로, 해당 성품을 가진 자들의 집단적 정체를 가리킵니다. εἰρηνοποιός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이 절에만 등장하는 하팍스 레고메논입니다. 이 합성어는 εἰρήνη(평화)와 ποιέω(만들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자'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평화를 좋아하거나 갈등을 회피하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분열을 치유하고 화해를 창조하는 행위자입니다. 플루타르코스의 『리산드로스』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세속적 용례도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 협약을 성사시킨 능동적 역할자를 가리킵니다.

주석적 논의:

μακάριοι의 선언적 성격은 팔복의 신학적 본질을 결정합니다. 벵엘(Johann Albrecht Bengel)의 주석 전통은 팔복을 '복음서의 복음'으로,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은 이 성품들을 수행해야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결과로 이 성품들이 점진적으로 드러나며 그러한 삶이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음을 선언받습니다.

εἰρηνοποιός의 적극적 함의는 설교와 적용에서 결정적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구현하며(롬 5:1; 고후 5:18-20), ② 인간 공동체 안에서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며, ③ 사회적 구조 안에서 공의와 화해의 문화를 창조하는 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능동적 화평 실천이 인간의 윤리적 역량에서 발원하지 않고, 먼저 화평케 하신 하나님(롬 5:10-11; 골 1:20)의 선행하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우리와 화목하셨기 때문입니다.

군·경 예배 맥락에서 εἰρηνοποιός는 특별히 날카로운 도전을 제기합니다. 군인과 경찰은 제도적으로 평화와 질서를 수호하는 직무를 맡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εἰρηνοποιός와 같은 것인지는 물어야 합니다. 예수는 '칼에 의한 평화'(pax armata)를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선언하시는 화평은 권력 행사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방법으로 실현됩니다(마 5:38-45). 이 긴장을 설교는 솔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설교적 함의: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정체성은 직업적 역할(군·경의 질서 수호)과 영적 소명(하나님 자녀로서의 화해 실천) 사이의 긴장을 드러냅니다. 이 긴장은 회피할 것이 아니라, 군인·경찰이 직무 현장에서도 εἰρηνοποιός의 성품—적을 원수가 아닌 사람으로 보는 눈, 갈등 속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최소화하려는 의지, 동료와 상하 관계 안에서 화해 문화를 창조하는 리더십—을 어떻게 살아 낼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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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b — ὅτι αὐτοὶ υἱοὶ θεοῦ κληθήσονται

본문: ὅτι αὐτοὶ υἱοὶ θεοῦ κληθήσονται

직역: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어·문법 핵심:

ὅτι(호티, '왜냐하면')는 5:9a의 복의 선언을 인과적으로 근거 짓는 접속사입니다. 복의 이유·근거가 뒤따릅니다.

αὐτοί(아우토이, '그들 자신이')는 강조의 독립 대명사입니다. 헬라어에서 동사가 이미 인칭을 포함하므로 별도 대명사는 불필요하지만, αὐτοί를 삽입함으로써 '바로 그들이, 다른 누구가 아닌 화평케 하는 자들 자신이'라는 배타적·집중적 강조를 더합니다. 팔복의 모든 약속 절에서 αὐτοί가 반복되는 것은(마 5:3-9) 이 강조가 의도적임을 보여 줍니다.

υἱοί(휘이오이, '아들들')는 명사 주격 복수 남성입니다. '아들'은 성품·본성의 공유를 함의하며, 히브리 관용어에서 '~의 아들'은 '~의 성품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관용 표현입니다(예: '빛의 아들들', '진노의 자녀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성품—특히 화해와 사랑의 성품—을 반영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θεοῦ(테오스, '하나님의')는 속격 단수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관계를 한정합니다. 정관사 없이 사용되어 질적 강조(qualitative genitive)가 있습니다.

κληθήσονται(클레테손타이)는 καλέω의 미래 수동 직설법 3인칭 복수입니다. 이것은 신적 수동태(Passivum Divinum)로,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 '불리게 될 것이다'는 단순한 명칭 수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공적 선언·인정을 의미합니다. LXX에서 καλέω는 509회 사용되며, 창세기 2:19(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이나 이사야 62:4("너는 헵시바라 불릴 것이요") 등에서 이름 부여가 새 정체성과 관계의 확립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κληθήσονται는 종말론적 함의를 가지며, 하나님의 최종적 선언을 미리 내다봅니다.

주석적 논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약속은 팔복의 다른 약속들(하늘 나라를 소유함·위로를 받음·땅을 기업으로 받음·하나님을 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신분의 선언이자 아직 완성될 종말론적 약속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 이중적 성격(이미/아직, already/not yet)은 성도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나(요 1:12; 갈 4:5), 그 자녀 됨의 완전한 드러남은 종말에 이루어집니다(롬 8:19-23).

주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호가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화해와 평화의 창조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5:45에서 같은 논리를 반복하십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하나님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화평의 하나님이시며, 그 성품을 닮은 자들이 그분의 아들들입니다.

κληθήσονται의 수동태는 개혁주의 신학의 하나님 주권 이해와 일치합니다. 자녀로 불리는 것은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포를 받는 것입니다. 이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논리와 평행합니다: 의롭다 하심도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인정에 달려 있습니다.

1차 문헌·어휘 빈도 근거:

교회 역사에서 마태복음 5:9은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나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석·설교되어 왔는지를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5.1 교부 해석 전통

니케아 이전 교부 (2-3세기)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 200 AD)는 교회 내 분열 문제를 다루면서 마태복음 5:9의 화평케 하는 자 개념을 적용합니다. 그는 바울이 "평화를 만드는 사도"로 자처하며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치유했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먼저 화평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의 내부 화해가 외부 사명보다 선행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오리게네스(Origen of Alexandria, c. 230 AD)는 화평케 하는 자를 내면의 통합과 외적 중재 모두에서 해석합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에서 정욕과 이성, 육체와 영혼의 갈등을 치유한 자만이 타인 사이를 진정으로 중재할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를 궁극적 화평케 하는 자로 제시하고, 제자들은 그 화평의 통로로 이해합니다.

니케아 교부 (4-5세기)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4-5C)은 『마태복음 설교』(Homily 15)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자신의 분쟁을 해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 사이의 불화를 중재하는 자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히브리서 12:14("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를 병행으로 제시하며, 마음의 청결(5:8)에서 화평케 함(5:9)으로 이어지는 영적 전진의 단계를 제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4-5C)는 시편 37:37 주석에서 "화평한 자에게는 남은 것이 있다"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합니다. 사망 후에도 씨가 남는다는 의미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는 현세를 넘어서는 영원한 기업이 약속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과의 접점에서 이 해석은 화평 실천의 보상이 현세적 성취가 아닌 종말론적 기업임을 지지합니다.

후기 교부 (5-6세기): 레오 1세

레오 1세(Leo the Great, 5C)는 진정한 평화가 세상의 우정이나 동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의 일치에서만 온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조화를 이루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연합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직업적 평화 유지(군·경)와 하나님 나라의 화평 사이의 질적 차이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해석의 흐름 종합

교부들의 해석은 세 주제로 수렴됩니다: ① 화평은 내면의 통합(오리게네스)에서 공동체적 화해(크리소스톰)로 전진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레오 1세)에 이릅니다. ②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이 합당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③ 이 복의 약속은 현세를 넘어 종말론적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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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설교사·수용사

중세 (13세기): 아퀴나스가 편집한 『황금 사슬』(Catena Aurea)은 암브로시우스의 해석을 전달하며, "먼저 자신 안에 화평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타인 사이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을 남겼습니다. 청교도 (17-18세기):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가정·이웃·교회 모든 영역에서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는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팔복 설교에서 하나님과의 내적 화평(칭의)이 외적 화해 실천으로 흘러나온다는 개혁주의 은혜론을 전개합니다. 19세기 복음주의: 알렉산더 맥라렌(Alexander MacLaren, 1826-1910)은 '일곱 번째 복' 전용 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삼중 성품—①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한 자, ② 다른 이들 사이의 분쟁을 치유하는 자, ③ 복음 선포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전하는 자—을 분석합니다. J. C. 라일(J. C. Ryle, 1816-1900)은 화평케 하는 성품이 단순한 기질이 아닌 성령의 열매임을 강조하며, "당신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갈등을 키우는 자입니까?"라는 자기 점검 질문을 제기합니다. 찰스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은 화평케 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업의 동역자들"로 묘사하며, 이 성품이 새 탄생의 가장 아름다운 표지 중 하나라고 역설합니다. 수용사 흐름: 중세 덕성론에서 시작된 해석은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성품 표현으로 재해석되었고, 청교도와 복음주의 전통은 이를 공동체 화해와 복음 선포의 이중 소명으로 확장했습니다. 개혁주의의 '은혜 → 성품 변화 → 윤리적 실천'의 논리가 일관되게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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